[시] 감기귀신

by 박재옥


감기 없는 한 해가 서운하다

약골의 오래된 연례행사

이 참담의 사슬 끊어보고자 지난겨울만은

두툼한 외투와 내복 착용을 고집하였다

그러나 희망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었을 뿐

봄 시샘하는 무심천변을 싸돌아다니고 온 것이 화근일 줄이야


밤새 잔잔한 일상을 달구던 열꽃들

덜컥, 걸렸구나

투명감투 쓰고 온 감기귀신에게

코 꿰어 끌려가는 내 몰골이 눈에 선하다

환절기 감기의 지독한 풍문을 인정하기 전에

내 몸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었던 교활한 녀석들


잘못된 습관보다 무서운 건 없다

서로 속고 속이는 관계 속에서

예방은 단지 눈가림에 지나지 않았고,

한손에 출석부 들고 줄줄 새는 콧물 닦다가

교탁 밑에서 무심코 보게 된 먼지 뭉치들

서른 개의 책상으로 꽉 들어찬 고3 교실이 적막하다

켜켜이 쌓여가는, 잠이 모자란 아이들이 내뿜는

피곤과 불안과 우울의 바이러스들

뒤 늦은 종례시간 후회의 뒤통수를 탁, 치며

다시 공중으로 폴폴 날아오르는

시커먼 날개 달린 것들

먼지 속의 아득한 생(生)


밤 열한 시가 돼서야 끝나는 야간자율학습 감독 마치고

동네 야간병원에 들러서 독한 주사 한 방 맞으며

내 안에 살고 있던 귀신도

언젠가는 도망칠 날이 올 것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을 버리지 못하는

박 선생의 늦은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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