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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정수 Dec 15. 2023

꽃돌


  파도가 일렁인다. 하늘과 바다가 마치 파란 비단 한폭을 풀어놓은 듯하다. 그 너머로 피어나는 노을이 꽃돌 속의 꽃처럼 번져간다.     


  아침 일찍부터 마음이 설쳤다. 바다가 보고 싶다며 무거운 눈꺼풀을 자꾸 보챘다. 결국 마음에 백기를 들었다. 가방 하나만 들쳐 메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행선지는 울진으로 찍었다. 딱 삼십 년만이다. 예전 잠시 살았던 곳이기에 한번은 꼭 와보고 싶었다. 그동안 사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곳을 다시 찾아오기까지 나에겐 그만큼 긴 세월의 뜸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동해 대로로 접어든다. 바다를 끼고 달리는 이 도로가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도로중 하나다. 연휴의 무거운 짐을 막 내려놓은 고속도로도 조금은 한산해 보인다. 연신 곁눈질하기가 바쁘다. 벌써 가을이 시작된 듯 선선한 바람이 살갑게 와 닿는다. 조금씩 목적지가 가까워지자 지나간 기억들이 가슴을 휘감는다. 중간 휴게소에서 차를 세울까 망설이다 곧장 달려간다. 어떤 힘이 끌어당기듯 마음이 서두른다. 울진이 점점 가까워지자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에 익은 시가지가 보인다. 예전 살던 곳이다. 차를 세우고 기억을 더듬듯 언덕을 올라간다. 주변 상가들이며 골목도 많이 변해버렸다. 하기야 강산이 벌써 세 번이나 바뀌었으니. 다행히 집은 그대로이다. 세월을 뽀얗게 머리에 인 건 저나 나나 마찬가지다. 하얀 벽이 더 하얗게 마주 섰다. 담 너머 기웃거리다 자칫 도둑으로 오해받을까, 얼른 돌아서 나왔다. 문득 뒤돌아다보니 임신한 새댁이 힘겹게 언덕길을 올라간다.   

   

  첫 아이 임신 직후, 남편이 울진으로 발령을 받았다. 바다 근처에 살았기에 바다가 보고 싶으면 언제든 망양정으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 옛날 바닷가 횟집에서 먹었던 물회가 눈앞에 삼삼하게 떠오른다. 시장에서 팔던 미역이랑 해산물도 싱싱하게 되살아난다. 울진에서 머무른 시간은 출산을 위해 다시 고향으로 내려오기 전까지 불과 일 년이 못된다. 그 이후로 남편은 직장 관계상 여러 도시를 돌아다녔다. 그 많은 지역 중 고고한 학처럼 살기엔 울진처럼 한적하고 평화로운 곳도 없었던 듯싶다.    

  

  망양정으로 향한다. 종종 산책하던 곳이다. 이곳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진 않았다. 수억 년을 살아온 바다에게 스쳐간 몇 십 년은 눈 깜짝할 시간이다. 그  짙푸름은 예전이나 다를 바가 없다. 왜 갑자기 여기를 와 보고 싶었을까. 아마도 풀어야할 매듭이 여태 있었나 보다. 가슴을 누르던 누름돌 같은 기억들을 주섬주섬 바다에 놓아준다. 스르르 빠져나가는 기억 끝에 노을이 마주보고 서있다. 

     

  그 당시 첫 아이를 임신한 새댁은 저 넓은 바다처럼 펼쳐질 인생의 파도를 생각지도 못했었다. 휘몰아치던 파도도 어느덧 반백을 건너왔다. 그 시간 속에 가슴에 맺힌 작은 돌은 바위만큼이나 커져버렸다. 서서히 번져가는 붉은 저 노을빛처럼. 번져가는 노을이 마치 꽃돌처럼 보인다. 꽃돌은 돌 속에 든 한 점 마그마가 식으면서 꽃무늬로 번진 것이다. 돌에게 그 꽃들은 아마도 상처가 난 흔적일 것이다. 그 상처를 품은 세월 속에서 돌도 꽃을 피워낸 것이다. 삶도 어쩌면 가슴에 꽃돌 하나 품는 과정인지 모르겠다.


  먼 노을을 바라보며 꽃돌 같은 삶을 살자며 마음을 다잡는다. 지나온 시간만큼 또 살아가야 할 날들이 남아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가슴에 꽃을 피운 꽃돌처럼 붉게 물들어 가면 좋겠다. 종종 가슴을 누르는 삶의 무게로 휘청거릴 지도 모른다. 그래도 어쩌랴 그것이 바로 인생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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