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의 제왕> 보로미르, 시간이 지나서야 보이는 사람

보이지 않는 짐을 짊어진 사람이 남긴 흉터의 의미

by 안지원

어릴때는 이해하지 못 했다.

그냥 악역인줄 알았다.

9명의 동반자 중 유일하게 탐욕을 드러내며 구성원을 해치려한다.

그가 숨을 거둘때 아라곤에게 기댄 채 죽어가는 모습의 대비는 선과 악의 대비처럼 극명해 보였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애잔하다.

지독하게 인간적이어서 딱하다.

근데 이런 감정이 드는건 물러터진 연민 때문만은 아닌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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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문이 좁아지는 세상이다.

살기 좋아졌다고들 말하지만, 그 편의성 안에서 줄어드는 기회는 모두가 체감하고 있을 것이다.

모두 어깨위에 심리적 혹은 사회적 짐 하나씩은 가지고 살고 있지 않는가.

누구는 취업의 압박, 누구는 결혼의 압박, 그 이유는 그대로 다양하다.


반지의 제왕 역시 그렇다.

중세 판타지 영화이지만 결국 인간이 만들어낸 인간이 사는 세상이다.

그리고 영화를 보면 볼수록 인간의 어깨를 짓누르는 보이지 않는 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반지를 파괴해 세상을 구하겠다는 염원 아래 모인 9명.

그 중 유일하게 죽음으로 끝을 보지 못한 이의 이야기를 오늘 파헤쳐 보려 한다.



Council_of_Elrond_-_FOTR.jpg image source: New Line Cinema

반지를 둘러싼 세상의 운명을 야기하기 위해,

모든 종족이 모인 리븐델의 회의 장면은 마치 UN회담 같기도 하다.

뒤로 물러나 방관의 자세를 취하는 종족,

말은 많지만 책임지지 않는 종족, 그들의 말싸움은 낯설지 않다.

그 중에서도 가장 적극적인 이는 보로미르다. 좀처럼 앉아있지 못한다.

그는 왜이리 불안에 떨며 집착하는것일까.



fa29af73-10d1-43a6-98f8-3ca3a6190f43_1795x950.jpg image source: New Line Cinema

중간계 지도를 살펴보면, 그의 불안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을 위협하는 세력은 동쪽에 위치해 있는 모르도르(MORDOR)이다.

난쟁이들은 그 곳에 가장 먼곳에서 위치해 있고, 엘프들 역시도 북쪽에 위치하며 이 세계를 떠나버리면 그만이라는식이다. 몇몇 인간들 역시도 수동적인 자세를 취한다.

하지만 보로미르는 동쪽의 모르도르와 지정학적으로 맞붙어 있는 곤도르(GONDOR)에서 왔다.

그는 이들중 유일하게 악의 세력이 어떤 존재인지 두눈으로 직접 본 사람이다.

그는 고향을 떠나기 직전에도 같이 싸우던 동료를 잃었을것이다.


그는 곤도르 왕국의 섭정(*왕의 부재로 그를 대신하는 인물)의 장남이다.

왕이라는 자리는 어렵다.

단순 왕의 자격이 핏줄에서 온다는 구시대적 관습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운명적이고도 상징적이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라는 말이 있듯이,

현대 사회에서도 리더의 자격이 충분한가 의심이 가는 사람을 우리는 많이 봐왔다.

보로미르와 그의 아버지는 용감한 군주가 될 수 있을지언정, 왕의 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보로미르 역시 자신의 아버지가 통치에 실패 하는것을 봐왔다.



lotr1_movie_screencaps.com_11063.jpg image source: New Line Cinema

그는 회의 장소에 도착해 곤도르의 가보인 나르실을 보고 경위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내 다른이의 시선을 느끼자, 검을 내팽겨 치고 달아나버린다.

이 모습은 그가 맞지 않는 자리에 올라선 인물임을 스스로 직감하고 있다는걸 상징한다.


하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억울하다.

왕위를 이었어야할 아라곤은 왕위를 내팽겨 치고 스스로 유배의 길을 걸으며 자연에서 순찰자로 살고 있다.

누군가는 앞에 나서 책임을 감당해야했고, 그것이 그의 아버지였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장남인 그에게 많은것을 기대고 있다.

실패한 섭정의 아들이라는 사회적 자리,

악의 세력과 맞닿은 지정학적 자리,

그런 자리가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 처럼 작용하고 있는것이다.


허름한 옷차림의 순찰자가 왕의 후손임이 밝혀졌을때,

보로미르는 세상을 부정당한 기분을 느꼈을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분은 질투, 원망 같은 감정으로 이어져 보이기도한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순수한 감정 역시 존재했다.



Lord-of-the-Rings-Fellowship-Aragorn-and-Boromir-in-Lothlorien.jpg image source: New Line Cinema

아홉 원정대의 리더였던 간달프를 잃고 더욱 불안에 떨던 보로미르였다.

잠을 이루지 못하던 그는, 아라곤이 다가오자 같이 왕국으로 복귀하자는 꿈을 야기 한다.

불안했던 그의 눈빛은 잠시나마 동경의 눈빛을 띈다.

하지만 아라곤은 대답이 없다.

그렇게 불안감에 잠식된 보로미르는,

반지를 이용하여 악을 물리치자는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프로도를 해치기에 이른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호빗들을 지키다 화살을 맞은 보로미르는,

죽어가는 순간까지도 불안에 떤다.

뒤늦게 그를 구하러 온 아라곤에게,

인간 세계의 멸망을 야기하며 절망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의 죽음에 연민을 느낀 아라곤은 왕이되어 몰락을 막겠다는 약속을 하고,

그는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마지막을 맞이한다.



어쩌면 그는 죽을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죽지 않았다면,

아라곤은 왕이될 결심을 하지 않았을수도,

프로도는 반지를 스스로의 힘으로 짊어져야한다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을수도 있다.

세상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을것이다.



Boromir-death-Lord-of-the-Rings-Fellowship-of-the-Ring.jpg image source: New Line Cinema

그가 단순 악역이 아님을 말하고 싶었다.

그의 서사는 마치 상처와도 같다.

아픔은 옅어지지만, 상처는 흉터가 되어 날이 가도 그 의미를 되새기게 만든다.


그는 죽음으로 여정의 끝을 보지 못했지만

불안에 찬 그의 눈빛은 여정을 함께한 이의 기억속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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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 주변에도 악인 처럼 보이는 인물이 있을것이다.

탐욕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

선인 보다도 악인이 많아보이는 세상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사람의 어깨 위에 보이지 않는 짐이 있진 않을지 생각해보면 좋지 않을까.

보로미르의 불안과 실수가 세상의 구원으로 이어지며 얻은 흉터가 되었듯이,

나쁘게만 보였던 이들도 어떠한 의미가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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