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울고 싶다.
낯선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어른인 나도 어렵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잘 적응한다는 말에 불안한 마음을 누르고 아이들과 어학연수를 가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에게 낯선 환경에서 늘 보던 자신과 다른 나를 만나는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어쩌면 내가 더 간절히 필요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늘 보는 모습, 늘 하던 생각에서 벗어나 진짜 나를 찾고 싶었을지도.
새로운 환경에서 영어를 공부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벗어나, 아이들이 자신의 그릇에 언어를 차곡차곡 채우기를 바라기에 큰 용기를 낸 것이기에 나 혼자 의욕에 불탔다.
내 욕심이 지나쳤나.
첫째가 울면서 선생님과 함께 내가 배우는 강의실로 찾아왔다. 너무 아프다고. 처음에는 덜컹 겁이 나서 아이를 데리고 기숙사로 한걸음에 돌아왔다. 두 번, 세 번이 되자 ‘여기에 들인 돈이 얼만데?? 이렇게 아프다고 너도 빠지고, 나도 빠지고, 둘째까지 빠지면 손해가 얼마야??!!’하는 생각이 훅 올라왔다.
아이에게 말했다. 이렇게 자꾸 수업 중간에 나오는 것은 너의 선생님에게도, 엄마의 선생님에게도 예의가 없는 것이니 앞으로 이런 일을 만들지 말라고. 무엇보다 너에게 이 시간은 다시는 올 수 없는 기회가 될 수 도 있으니 최선을 다하라고.
그런 비장한 각오는 아이에게 부담만 줄 뿐이데. 왜 그런 말을 했을까.
4주에 접어들었을 때, 아이가 울면서 또 나를 찾아왔을 때는 아이를 질질 끌어냈다. 울더라도 강의실에 들어가라고 했다. 자기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아서였을까. 아이는 복도에서 목놓아 울었다. 아프다고. 쉬고 싶다고. 너무 힘들다고.
복도를 지나가는 다른 선생님들은, 아이가 우니, 즐겁게 수업하는 것이 좋다고 쉬는 것이 좋다고 한마디 하시며 지나가신다. 그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떠오르는 생각. ‘돈이 얼만데.’ ‘보충도 할 수 없는데 왜 자꾸 수업을 빠져!!’ 게다가 힘들다고 중간에 나오는 것이 행여 습관이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아이가 두 달 만에 큰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태도는 적극적이기를 바랐다. 손짓 발짓을 하며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해보려 노력하고, 학교 안 학생들과 씩씩하게 인사하기를 바라기에 아이에게 매일 인사해! 말해! 대답해! 를 종용했다. 그것 역시 큰 욕심이었는데.
둘째는 아침마다 학교 갈 준비하라는 나의 말에 운다. 힘들어. 쉬고 싶어. 유치원에서 선생님과 친구들과 놀이할 나이에 일대일로, 들리지도 않는 영어수업만 하니 얼마나 힘들까. 이왕 시작한 것 6시간 수업하고 싶은 나의 욕심에 제동장치를 걸어준 것은 친한 영어선생님이다. 만 6세 아이에게 4시간이면 충분하다고. 그 4시간 수업을 일대일로 진행하는 것이 아이의 짧은 집중력에 쉬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유치원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모르는 영어를 최대한 들으려 집중했을 아이. 둘째는 눈뜨자마자 기분이 안 좋다고 칭얼대며 하루를 시작했다.
적응기 아침은 둘째의 울음으로 시작해서 나의 버럭으로 마무리되기 일쑤였다. 이렇게 밀착해서 하루종일 지낸 것은 사실 처음이다. 심지어 방이 좁아 서로 비켜서야 다른 사람이 이동할 수 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자주 뾰족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