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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Sep 28. 2022

아시나요, 잘생긴 남자로 사는 기분?

이촌한강공원 나갈 때는 가족김밥 떡볶이





10년인가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겨울방학을 맞아서 동기들과 인턴을 나가게 되었다. 그때 나와 함께 인턴 과정을 보낸 사람은 J라는 형이었다. J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야말로 '군계일학'이라는 수식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큰 키에다 8등신이 넘는 비율, 선이 분명한 미남이면서도 서글서글한 좋은 인상의 얼굴, 항상 단정하고 정갈한 옷차림 신사였던 그는 겉모습과 잘 어울리는 점잖은 목소리 차분한 말투를 가지고 있었다. 너무 수령님 찬양하 듯 찬양하는 것 같아서 생략하려고 했지만 그는 국내 유명 대학을 졸업한 재원이기도 했으며, 저렇게 다 가진 사람임에도 지인들에게 미움받지 않는 인간성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때 J형과 함께 인턴과정을 보내면서 잘생긴 남자로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었는데, 오늘은 그 이야기를 간단히 풀어보고자 한다.


그 인턴 과정은 다양한 학교의 지원자들이 고루 참여한 자리였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성비는 5:5에 근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인턴들의 나이는 어리게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까지였다. J형은 역시나 그곳에서도 군계일학이었다. 그가 걸어갈 때마다 그가 걸친 검은 캐시미어 코트는 은은한 니치 향수의 향을 흘려냈고 남자든 여자든 그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일부는 보는 듯 안 보는 듯 연신 눈을 굴렸다. 그는 그의 재능을 과시하기는커녕 전혀 행사하려 하지 않았으나, 그냥 걸어가기만 해도 마치 조조군을 휘젓고 다니는 연의의 조자룡처럼 주위 남자들을 베어 넘겼고 주위 여자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남자든 여자든 그의 옆에서는 다 추풍낙엽이었다. 내 상상 속 이미지는 그야말로 거대한 폭풍과도 같은 광경이었으나, 실제로 그 현상은 아주 조용하고 차분하게 일어났다. 내가 당시 여러 번 경험하여 이 정도면 귀납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명제들은 아래와 같다.


1. 서 있든 앉아 있든 사람들이 모이는 상황에서 그의 근처는 유독 여성의 밀도가 높았다(반면 남자들은 그의 옆을 피했다 특히 사진 찍을 때).

2. 그가 승강기에 탑승하면 먼저 탑승해있던 사람들의 대화가 잠시 한 호흡 정도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되었다(각자에겐 찰나였겠지만 깊은 고요 덕에 나는 꽤 길게 느껴졌다).

3. 주위에 있던 여자들은 작은 명분이라도 생기면 그에게 무언가를 물어보거나 확인하려 했다(가까이에 다른 사람이 있어도 조금 덜 가까운 그에게 시간을 물어봤다).

4. 꽤 여러 명의 여자들 조금이라도 그에게 눈인사할 기회가 있으면 눈인사를 했다(옆에 있던 나는 그런 사 받지 못했다).

5. 눈인사든 대화든 그와 사소한 접촉이 있었던 여자들은 그를 다시 마주하면 마치 오래 알던 사람처럼 인사했다(역시나 옆에 있던 나는 그런 인사 받지 못했다).


J형은 자상하지만 경우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그러한 상황에 아주 익숙했다. 하기사 하루아침에 잘생기고 멋있어진 게 아닐 테니까... 모르는 사람이 보내는 인사나 큰 의미 없는 질문에도 아주 친절하게 답해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인사도 적당한 각도로 잘 응대해주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거기까지였다. 야박하게 말하자면 필요한 내용 외에 조금의 여지도 더 주지 않았고, 무언가 진전시키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분명하면서도 절대 불쾌하지 않게 잘 끊어냈다. 그가 가진 압도적으로 우월한 특성들로 말미암아 똑같은 거절도 상대방으로서는 더 수치스러울 수 있었을 것 같은데, 그가 가진 공손함과 경위 바름이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켰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따른다'는 명제를 잘 지키는 것일까? 아니면 하늘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힘을 준 것'일까? 나는 그의 그런 면이 정말 부러웠다. 그의 잘생긴 외모나 종잡을 수 없는 인기도 충분히 부러움의 대상이었지만 그의 경위 바름과 절도 있음이야말로 그를 훨씬 더 빛나게 해주는 부러운 재능이었다. 너한테는 어차피 있어도 쓸 일 없는 재능이라고? 흥, 그렇지만도 않다.


잘생긴 남자로 사는 기분... 나는 그런 기분 쉽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당신도 할 수 있다. 분식집에 들러 떡볶이와 튀김을 한가득 포장해서 거리를 걸어보자. 와, 시선집중. 사람들이 나를 쳐다본다. 힐끗힐끗 어디서 파는 무슨 떡볶이인지 확인하려 할 것이다. 무엇이 들었는지 알기 쉬운 투명 내지 반투명 봉투면 정말 좋고, 떡볶이집 상표가 붙은 봉투도 시선집중에 최고다. 검정봉투라서 아쉽다면 길 가다 보이는 아무 건물이나 들어가서 엘리베이터 좀 타고 오자. 그래, 가능하다면 분식이 포장되는 동안 튀김기 근처에서 튀김 냄새도 좀 입어두는 게 좋다. 내가 승강기에 탑승하면 먼저 타 있던 사람들의 대화가 잠시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될 것이다. 냄새가 영 안 난다면 이쑤시개로 포장에 구멍을 좀 뚫어보자. 좋은 냄새를 맡은 사람들은 나에게 자꾸 눈인사를 할 것이다.


너무 천박한가? 맞다. 우리는 J형에게 배웠다. 경위 바르고 절도 있게! 큰 힘에는 큰 책임이!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떡볶이와 김밥을 사들고 공원으로 나가자. 우리의 잘생김을 행사하려 하지 말자. 과시하려 하지 말자. 타인의 시선을 취하려 하지 말자. 한 손에는 떡볶이, 다른 한 손에는 김밥을 들고 비로소 나는 잘생겼다. 그래 그걸로 됐다. 그러나 혹시라도 누가 물어본다면 정중하게 알려주자. 이촌동 가족김밥에서 샀다고. 이촌 한강공원으로 산책을 나간다면 한강쇼핑센터를 들리셔야 한다고. 무를 넣어서 자연스럽게 달콤한 떡볶이를 파는 비밀스러운 맛집이라고. 내 미모의 비결, 내 인기의 비결, 가족김밥 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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