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이런 걸 시작했습니다!'
인스타그램에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도 그렇고, 브런치에 에세이 연재를 시작했을 때도 그렇고, 나는 친구들에게 이를 널리 알렸다. 힘들게 작업하는데 한 명이라도 더 봐주면 좋겠다는 이유도 있었고, 무엇보다 널리 알려야 흐지부지 되지 않고 책임감 있게 계속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근데 이게 본의 아니게 우리 모두를 괴롭히게 되었다. 나와 친하다고 해서 가깝다고 해서 꼭 내 작업물에 관심을 가져줘야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도 사람이다 보니 어느 정도는 그래 주길 바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들도 또 그런 내 마음을 전혀 모르는 건 아니고. 그렇다. 팔로우(구독)와 좋아요(라이킷)가 마치 우정의 십자가 밟기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십자가 밟기'란 가톨릭 신자를 색출하여 탄압하기 위해 사용됐던 방법으로, 신자로 의심되는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나 성모 마리아가 새겨진 목판이나 금속판 등을 밟게끔 했던 것을 말한다. 십자가 밟기를 거부하면 박해당했고, 지시에 따르면 화는 면했지만 그로써 그의 인격은 파괴당했다. 오호통재(嗚呼痛哉)라. 다 같이 행복하자고 시작한 일들인데 친구들을 시험대에 오르게 하면 쓰겠는가. 조심스러워진 나는 보통 한 번 정도 소식을 알리고 더 이야기하는 것은 삼가기로 했다.
우정이라는 것은 말만 들으면 좋은데 자세히 살펴보면 참 어렵다. 일단 우정이란 무엇일까? 친구 사이의 정? 단순히 알고 지내는 사이나 인맥을 넘어서 우정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공감대를 요구한다. 친구는 소통이 필요하다. 공통의 맥락이 없으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또 어느 정도 이해관계에서 자유로울 것을 요구한다. 정확히는 서로를 위해서 어느 정도 손해도 봐줄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작위든 부작위든 상대를 위해 기꺼이 에너지를 써주는 것이 우정이다. 친구의 귀찮은 부탁을 들어주는 것도 우정이고, 부탁을 안 들어주는 친구를 이해해주는 것도 우정이다. 적극적으로 그런 거 하지 말라며 조언해주는 것도 우정이고, 소극적으로 그런 거 하지 말라고 관심 안 가져주는 것도 우정이다.
그래, 내가 본업에 충실하라고 관심 안 가져주는 우정에 감사해야지. 각자 사느라 바쁜데 관심 좀 안 줄 수도 있지. 그런 친구를 이해하는 나의 우정도 아름답다. 아름답다. 아름답다... 그렇게 몇몇 절친(?)들의 냉소적인 반응을 애써 뒤로 하고 우정이 샘솟는 자기 합리화 주문을 외우며 지내던 도중,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 생각지도 못했던, 바꾸어 말하자면 관심을 가져주리라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지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떡볶이에 대해서 말을 건네 왔다. 이는 정말 큰 기쁨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았던 건 이렇게 떡볶이를 좋아하는지 몰랐다면서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고 제안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생겨난 것이다.
떡볶이를 함께 먹는다는 것은 어떤 일이냐! 예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데, 떡볶이는 편안한 음식이다. 보통 마음이 편안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음식이다. 가족과 친구와 함께하는 음식이다. 부담 없이 자리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음식이다. 한편으로 떡볶이는 불편한 음식이다. 덥거나 추운 곳, 작거나 협소한 장소에 불편하게 앉거나 서서, 자칫 좀 덜 위생적일 수 있는 환경에서, 조금은 추접해질 수도 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다. 떡볶이를 함께하려면 편안해야 하고 또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내가 원한들 남이 원하지 않을까 봐 쉽게 제안하기 어렵다.
그래서 떡볶이를 함께 먹자고 하는 것은 아무나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리고 떡볶이를 함께 먹은 사이는 여간 특별한 사이가 아니다. 그렇다. 떡볶이 약속은 정말 중대한 우정의 증표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 고 노무현 대통령은 외국 손님들을 모신 어떤 공식 만찬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여 주목받은 바 있다. 그는 우리말 중 '식구'는 가족이라는 의미로 같이 쓰인다고 말하며, 이는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비롯되었다 설명했다. 그리고 내빈들에게 우리는 같이 둘러앉아 밥을 먹었으니 이제 식구가 되었다며 따뜻한 마음을 전했다. 그래 그냥 밥도 그러한데, 함께 둘러앉아 떡볶이를 먹는 사이는 어떠한가? 가족만큼이나 각별한 사이 아니겠는가?
소중한 사람들에게 지금 제안해보자. '우리 같이 떡볶이 먹으러 갈까요?' 갑자기 그런 말 하기 조금 새삼스럽고 어색하다면 이런 이야기로 아이스브레이킹을 시도해보자. 떡볶이와 우정에 대한 어떤 이야기이다.
옛날 옛적에 신당동의 어떤 떡볶이 맛집, '우정'에서 있었던 일이다.
...떡볶이의 신은 떡볶이의 명예를 드높이는 어떤 훌륭한 떡볶이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신당동을 찾아갔다. 그곳엔 슬랜더한 몸매의 떡볶이가 손님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떡볶이의 신은 그가 감칠맛 나는 소스를 잘 담아내는 정상급 기량을 갖추었음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치하하려 하였다. 그러나 떡볶이는 말했다.
"신이시여, 저는 그저 조연에 불과하옵니다. 소스를 가득 품는 쫄면과 라면, 그리고 얇은 어묵이 주인공이니 그들이 상을 받아야 합니다"
떡볶이가 그렇게 자신을 한껏 낮추는 이야기를 들은 쫄면, 라면, 얇은 어묵은 소리를 모아 이야기하였다.
"신이시여 아닙니다. 우리는 다 볶음밥의 애피타이저에 불과하지요. 이 모든 명성은 볶음밥 덕입니다."
그래서 신은 볶음밥을 불러 공을 치하하려 하였다. 그러니 볶음밥은 볶음밥대로 손사래를 쳤다.
"아마도 그건 우리 가게 닭발 때문일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별미인 닭발에 비하면 볶음밥은 안 먹어도 그만이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닭발은 뭐라 했겠는가?
"네? 여기는 즉떡 맛집인데요! 저는 닭발입니다!'"
서로 공을 돌리는 아름다운 모습에 감동한 떡볶이의 신은 말했다.
"너희들의 이런 화목한 모습을 보니 기원전 철학자 변덕규가 한 말이 떠오르는구나. 그는 '우리 팀엔 점수를 따낼 수 있는 녀석들이 있다. 내가 30점, 40점을 넣을 필요는 없다. 난 팀의 주역이 아니라도 좋다.'라고 말했단다. 너희 각 재료들이 어느 하나 튀지 않고 각자의 영역에서 맛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그야말로 팀워크가 잘 갖춰진 모습에 내가 진심으로 감동했다. 너희가 오래오래 화목하게 서로 위하며 행복할 수 있도록 내가 축복을 내려주겠다."
... 그렇게 우정은 이곳이 신당동 떡볶이 타운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맛집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우정에 찾아가 떡볶이를 먹으며 새삼 우정에 대해 생각해본다. 재료들이 냄비 안에 화목하게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끓어오르는 사이 이 가게는 명가로 이름났다. 나는 당신과 편안하게, 불편한 자리여도 편안하게 둘러앉아 떠들썩하게 떡볶이를 먹고 싶다. 나는 당신과 그런 팀이 되고 싶다. 찾아주셔서 감사드리고, 칭찬과 격려에 감사드리고, 좋은 이야기 행복한 이야기 전하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겠다고 다짐해본다. 주인공이 되어 부귀영화 이루지 못해도 좋다. 우리 팀엔 당신이 있으니까. 구독과 좋아요 안 해주셔도 좋다. 당신이 나를 찾아준 것만으로도 행복하니까. 찾아주지 않는대도 좋다. 당신으로 인해 나는 행복하니까.
우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마치 떡볶이를 같이 먹는 사이와 같은 것.
자리가 조금 불편해도 좋습니다. 우리는 친구니까, 결국 함께하면 편안하니까.
그래서 말인데, 혹시 떡볶이 좋아하십니까? 같이 먹으러 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