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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떡믈리에 Oct 24. 2022

천사의 몫을 바칩니다.

이곳은 떡볶이의 신전, 작은공간 떡볶이

"천사의 몫"


오크통에 보관된 위스키는 해마다 2%가 증발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데 그걸 "엔젤스 셰어(Angel's share)", 천사의 몫이라 한다. 제조해서 판매하는 입장에서 이는 고민거리에 불과하겠지만, 즐기는 우리로서는 낭만이 아닐 수 없다. 신이시어, 천사의 몫을 기꺼이 바치오니 우리에게 즐거움을 허하소서!




엔젤스 셰어는 나에게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인 고수레(고시레라고도 한다. 이하 '고수레')를 떠올리게 한다. 고수레는 사람이 음식을 먹기 전에 조금 떼어 허공에 던지면서 '고수레'라고 외치는 민간신앙 행위이다. 내 몫을 바친다는 부분은 엔젤스 셰어와 동일해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엔젤스 셰어가 '수동적인', '현상'인 반면, 고수레는 '능동적인', '행동'이라는 점?


고수레하는 음식은 따로 준비하지 않는다. 먹고자 하는 그 음식을 던진다. 고수레는 음식을 먹는 우리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함께 존재하는 모든 것을 위한 의식이다. 여기에는 기복적인 부분뿐만 아니라 대자연을 포함한 모두와 함께 살아가자는 생명 존중의 의식과 공동체 의식 또한 담겨 있다.


먼저 고수레의 기복적인 부분을 살펴보자. 웃어른에게 먼저 음식을 권하는 것처럼 신에게 먼저 음식을 바친다.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고수레를 외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제사를 받은 신이 나에게 복을 줄 것에 대한 강한 확신을 드러내는 것이라 한다. 둘째, 고수레는 생명에 대한 존중과 공동체 의식을 담는다. 고수레 한 음식은 자연에 사는 동물과 곤충 등이 먹게 된다. 식사할 때 곁에 누가 있으면 기꺼이 권하는 것이 우리의 도리 아니겠는가. 공원에 나가 돗자리 깔고 이것저것 먹고 있으면 기대가 가득한 새들은 주위를 맴돌고 자리를 빼앗긴 개미들은 분주하다. 우리나 그들이나 자연에 같이 얹혀서 사는 이웃들이다. "고수레!" 같이 잘 살아보자꾸나! 셋째로, 고수레는 사람끼리도 서로 나눈다. 찾아온 손님은 물론이거니와 근처에 있는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음식을 나누어 준다. 그렇게 우리는 정을 나누고 선순환을 이끌고 다 같이 행복하게 잘 살고자 노력한다.




'기범, 상수, 재욱 왔다감. 2002. 4. 12.'

'스타워즈 ㅅㅂ 다시 만들어라 이게 뭐냐'

'오X창(39, 미혼) 애인 구함, 인천에 자가 있음, 010-xxxx-xxxx'

'중간고사 망쳤다. 기말에 만회하게 해 주세요!!! 20945 정X이'

'강ㅇㅇ 메롱' '이ㅇㅇ 니가 더 메롱' '니네 둘 다 메롱'

'사랑하는 소X희 알라뷰 포에버'

'나 김프로, 올해 반드시 싱글 친다.'

'김X연, 김X원, 김나X, 정X정 우리 우정 영원히.'


행복을 바라는 무리들이 하나 둘 여기로 모여든다. 벽에 가득한 낙서들이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빼곡히 벽을 메운 글귀들모여 마치 이쪽은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작품 같고 저쪽은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의 작품 같은 이곳, 작은공간은 떡볶이의 신전이다. 신도들은 저마다 추억과 소망을 담아서 떡볶이의 신에게 호소했고, 그 마음들이 모여 삶을 고양하는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우리는 앞치마를 곱게 걸치고 식기를 정갈하게 배치한다. 제사장은 경건한 걸음으로 제수를 들고 나타난다. 라면, 쫄면, 어묵, 계란, 만두가 가득 올려진 냄비가 버너 위에 올려진다. 조심조심, 냄비를 세지 않은 불로 살살 끓인다. 조금씩 조금씩 국물이 졸아들기 시작한다. 엔젤스 셰어(Angel's share), 천사의 몫이다.


그렇게 경건하게 그의 몫을 바치고 나면 이제 우리 몫이다. 즉떡에서 찾아보기 힘든 이 자작함이란! 조림으로 변해있는 어묵, 양념을 가득 마신 면발, 볶은 것처럼 양념을 입은 떡볶이가 우리에게 내려졌다. 다시 제사장을 부른다. 이제 한편에 볶음밥을 볶고, 치즈를 얹으면, 그래 축제의 시작이다.


물론 이 모든 절차를 멍하니 기다리고 있을 필요는 없다.

떡을 집어던질 필요도 없다.

떡볶이의 신은 관대하니까.


떡볶이의 신이시어, 천사의 몫을 바칩니다!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고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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