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바다 Sep 06. 2023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 그 단어만으로도 가슴에 파문이 인다. 잔잔한 파동이 넓어지면서 명치 언저리쯤 숨어있던 시큰하고 날카로운 추억이 설렘처럼 존재를 드러낸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때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저항할 틈도 없이 일상에서 박리되어 싱크홀에 빠지게 된다.

 설레고 배려하던 순수의 마음은 지금은 어디에 두었는가. 

 비 오는 아침에 커피 볶는 향기가 코로 훅 들어왔을 때 걸음의 속도를 줄이고, 나도 모르게 가게 안을 흘깃 들여다보듯, 그림은 나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구스타프 클림트(오스트리아 1862~1918)의 ‘키스’ 그림을 처음 본 것은 미술대 입시 준비를 하는 동네 형의 집이었다. 중학생인 나는 그림을 본 순간 황홀하다는 느낌과 함께 서로 사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황금색 치장은 하늘의 신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작가 이름과 작품명을 물으니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라고 말했다.

 형태적 이미지는 즉각적이고 즉흥적이다.

 그것은 단번에 우리 시선을 끌고, 연상 작용으로 우리 머릿속을 채운다. 형태를 보는 순간, 섬광과도 같은 짧은 시간에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키스’를 보는 순간이 그랬다. 영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처럼 그렇게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은 나에게 화보로 처음 다가왔다.

 그때 이후 좋아하는 그림을 말하라면, 누가 뭐라고 해도 “클림트의 키스”라고 말했다.

     

 여행을 좋아해 떠난 유럽의 첫 여행지는 동유럽이었다. 목적은 단 하나 ‘키스’를 보기 위해서 2년이라는 시간을 달래며 경비를 모았다. 도착한 오스트리아 빈 공항 공중전화 부스에는 ‘키스’ 그림과 함께 이런 문구가 있었다. 

 “클림트의 키스를 보기 전에는 오스트리아를 떠나지 마라”

 오스트리아 국민이 클림트에 대한 자부심이 얼마나 큰지를 알려주는 대목이다. 상궁은 오스트리아 현대미술품, 하궁은 중세, 바로크 미술품으로 나눠진 ‘벨베데레 궁전’으로 클림트의 ‘키스’를 보러 상궁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기대와 설렘으로 가득했다.

 “클림트의 키스를 보고 싶으세요. 그러면 비엔나로 오세요. 절대 다른 곳에서 볼 수 없습니다.” 

 실제 클림트의 “키스”는 오스트리아를 떠난 적이 없다. 자부심이 가득한 오스트리아 국민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와아!”

 그림을 실제 보는 순간 황홀함에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동공은 크게 열리고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두 번째 직접적으로 만나는 ‘키스’는 황홀감으로 가득했다.

 ‘저 미려한 곡선과 채색, 그리고 문양의 조화!’

 사랑에 빠진 사람은 그 자체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찬란한 황금색 의상을 입은 한 쌍의 남녀가 꽃밭 위에서 키스한다. 연인만 있을 뿐 세상은 방해하지 않으려고 고요하다. 화면 전체가 황홀한 금빛과 아름다운 꽃으로 장관을 이루고, 남자의 머리와 구부린 목선, 사뿐히 접힌 여인의 다리와 발꿈치만 보인다. 장식적이고 정교한 클림트만의 독특한 문양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황금빛 색채의 비밀’ 구스타프 클림트 레플리카전을 울산도서관에서 진행한다고한 첫날, 첫 시간 도슨트 해설하는 시간에 세 번째 만났다.

 다시 보는 클림트의 그림 세계는 화려함 뒤의 ‘끌림’이 있었다.

 오스트리아에서 원작을 본 이후 늘 머릿속에 남아 있는 궁금증이었다. 아카데미즘 작품을 지나 분리주의 작품으로 오면, 그림 속에는 알게 모르게 죽음의 영혼들이 등장한다. 살아가면서 늘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한 가운데 그림을 그린 클림트의 무의식과 몽상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화려한 그림 넘어 죽음의 색채를 입히는 생각은 다른 이면의 세계를 표현하기 위한 시선의 다름이라 할 것이다. 보여주는 현실과 이상적인 의미가 다른 남다른 시선 말이다.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분리주의 예술을 지향한 구호이다.

 예술에 대한 다양한 의지를 분명히 시대적 상황을 담아 표현한 말이라 생각한다.

 결국 현재 회자가 되는 ‘다름의 인정이다.’,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다.’라는 분리주의 미술은 그렇게 주창하여 시작되었고, 클림트가 가장 화려한 시기를 이뤘다.  

   

 의문이 갑자기 들었다.

 대표작 ‘키스’ 작품에 분리 내지는 해체가 이뤄지는데, 얼굴은 왜 분리되지 않았는가?

 그림 해설하자면 그림 속 주인공 남자는 그리스·로마 신화 주인공 ‘제우스’ 여자는 ‘헤라’이다. 신화 속 제우스와 헤라가 키스하면 그 동산에 있는 꽃이 일제히 활짝 핀다는 신화를 바탕으로 그려졌다. 그래서 꽃이 활짝 피었다. 화려한 색채 속에 분리된 비잔틴 모자이크화를 형상화한 것이다. 얼굴에 대한 분리는 이뤄질 수 없었다. 작가도 시대적 상황에 표현 못하는 경계의 벽이라고 할까?

 이후 피카소(1881~1973)는 세잔의 영향을 받아 완전하게 입체파라는 이름으로 분리해 낸다.

 클림트가 얼굴을 분리하지 못한 이유라면 개인적인 시각, 한마디로 말하자면 ‘죽음’,늘 죽음 이후의 세계에 힘들어한 클림트이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융합’은 물리적, 화학적 결합으로 녹이는 일이다.

 분리주의 조각난 그림을 들여다보면 하나 그 자체다.

 스펙트럼을 통과하는 빛은 모든 색을 표현하지만, 그 자체는 단색을 표현한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는 융합이 있다. 아카데미 적 플로 아르, 인상파와 후기인상파, 분리주의에서 출발하여 후기인상파인 세잔의 영향을 받은 남다른 시선의 입체파, 그 이후 야수파 등이 그들만의 세계를 표현했다.

 ‘융합’ 말 그대로 그 자체로 봐야 한다. 궤변인지 모르지만 ‘기본’, ‘원칙’에 무시가 없이 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융합을 배제하고 집단적 분리주의 내지는, 개인적 분리주의는 중심을 벗어나지 않아야 다름을 인정받을 수 있다.


 공동체라는 보편적 상식과 그로부터 발생하는 선한 영향력을 인정하지 않는 이기주의나 개인주의는 자기 합리화다. 독자적이라는 선택은 공동체 속에서 이뤄지는 선택이다. 즉, 우리의 영역이다. 각자가 스스로 평가하는 영역이 아니라 생각한다. 

 ‘우리 속에 나와 네가 되어야 독자적이라는 것이다.’ 

 보편적 상식과 틀에 벗어나지 않는 공동체 속의 독자적이라는 말이 된다. 너무 쉽게 ‘개성’ ‘독자적’이라는 말로 ‘괜찮아! 내가 선택하면 그만이야.’, ‘내가 세상의 중심이야!’라는 말로 치부하는 사람을 본다. 그것도 모자라 사회적 현상이라며 맞장구를 치는 선택적 매너리즘에 빠진 시선의 주안점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네가 있어야 내가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 대표작 ‘키스’ 작품의 백미를 난 여인의 발끝이라 본다. 그림 속 입맞춤에 꽃피는 동산이 화려하게 일자로 펼쳐져 있다. 생각해보라. 뭔가 뭉뚱그려지지 않은가.

 낭떠러지 위에서 삶과 죽음을 교차하는 사랑이기에 더 빛이 난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시절 한 여자아이를 짝사랑 한 적 있다.

 생각해보면 10살 나이에 뭘 아는 것보다는 순수한 그 무엇이 있었다. 마냥 좋았다. 이성적인 것이 아니라 그림을 잘 그려서, 보는 시선에 따라 다르지만 예뻐서, 공부를 잘해서 등 무조건적 사랑이었다. 그림에 더해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는 시간이다. 이 말 하나만 생각해도 상대의 온기가 느껴진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레플리카전: 그림이나 조각을 원작자 수준으로 만든 사본

『건축학개론』 영화 내용 인용: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구글』 사진 인용: ‘키스’ 그림

작가의 이전글 시간속의 시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