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미(悲劇美)라는 말의 아름다움은 원래 슬픔으로 통하는 감정이어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은 아닐까?
나르시시즘이라는 말을 만든 ‘수선화’는 잘 알려진 자기 사랑과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자신의 아름다운 얼굴이 물에 비친 것을 보고, 끝없는 자기 사랑에 빠져 자신을 바라보며 물로 들어간 아름다운 꽃 이야기다.
사랑이 아니어도 인간은 누구나 자기 생각에 갇혀 있다. 눈이 먼 그 생각은 운명의 사슬이 되어 알 수 없는 곳으로 끌고 간다. 자기 생각으로 꽉 막힌 마음에서는 조그만 갈등도 욕망의 불길로 발화하기에 십상이다. 마음속 마찰에서 발화한 욕망의 불은 모든 걸 파멸시킬 수도 있다. 꽃이 아름답다고 꽃을 든 사람도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에밀리에게 장미를』은 공포와 전율을 동반하는 기괴한 사랑을 빚어내기도 한다. 미국 남부 귀족의 상징인 에밀리가 세상을 뜬다. 마을 사람들은 장례식보다는 집 내부에 대한 호기심과 귀족의 막을 내린 전통을 보려고 집으로 들어간다. 더구나 에밀리의 집은 오랜 세월 하인 이외에는 누구도 들어간 적이 없었다. 에밀리의 장례식을 마치고, 지난 40년간 한 번도 에밀리 이외에 누구도 들어가지 못한 방문 앞에 서게 된다. 하인조차 들어가지 못한 방문을 열기 위해 문을 부수고 열자, 방금 벗어놓은 듯한 남자의 구두와 셔츠와 타이가 가지런히 놓여있다. 첫날밤을 위해 꾸민 신방으로 먼지가 가득한 모습이다. 침대에는 한 남자가 누워있다. 해골이 된 그 남자는 누군가 포옹하는 자세였다. 옆에 베개는 방금 누군가가 베었다가 일어난 듯이 움푹 파인 자국이 뚜렷하다. 마을 사람 누군가 베개에서 철회 색의 기다란 머리카락 한 올을 들었다. 떠나려는 남자를 독살하고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수십 년간 동거를 해온 에밀리의 행동은 엽기적이다. 굳게 잠긴 방안에서 세상을 등진 채 자기 생각에만 갇힌 것이다.
장자의 『추수편』에 보면 우물 안 개구리에게는 바다를 이야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한 곳에 갇혀 살기 때문이다. 우물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사람들은 감옥처럼 좁은 그곳이 세상 전부인 줄 안다. 공간만 갇히는 감옥이 아니다. 메뚜기에게 겨울을 이야기하는 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고 말한다. 여름벌레는 얼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시간 속에 갇혀서 얼음이 얼 때까지 살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간과 시간만이 감옥이 아니다. 한 가지 배운 것에 얽매여 평생을 외눈으로 살아가는 선비 이야기도 한다. 눈과 귀를 막는 완고한 마음도 생각을 가두는 큰 감옥이다.
사진을 좋아하는 나는, 사진에 사람이 들어가야 한다는 강박 관념 같은 것이 있었다. 풍경 사진의 자연적인 모습도 좋지만, 유기체인 사람이 없다면 의미가 퇴색한다고 생각했다. 나무나 풀, 물 등과 다르게 ‘생명’이라는 연결고리를 무기체인 돌 같은 물체는 갖지 못한다 생각하던 어느 날, 쓰레기 줍는 봉사활동 하러 갔다가 바닷가 놀고 간 아이 흔적을 발견했다. 아빠♡엄마, 누군지 모르지만 무기체인 돌로 만든 흔적을 보며 사랑을 느꼈다. 교감을 한 것이다. 생명체의 개념이 머리를 흔들었다.
인간을 가두는 것은, 꼭 쇠창살만이 아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 스스로 방문을 걸어 감옥과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생각해 봐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안에 갇혀 산다. 다만 누구도 자기가 갇혀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뿐이다. 요즈음 나는 나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정확히는 내가 지닌 가치에 대해서, 그 가치를 발현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앎의 첫걸음이 아닐까? 윌리엄 포크너의 단편소설『에밀리에게 장미를』이나, 장자의 우화가 남의 얘기로만 들리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