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삶에 대해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선택에 대해 타인이 어떤 평가 하느냐 하는 건 타인의 생각이고, 나는 타인의 생각을 듣기만 할 뿐 행위로 연결되어서는 안 된다. 타인에 대한 평가에 둔감해져야 한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야 나만의 시선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라는 것은 누구라도 내 경계에 개입하지 않고, 나도 타인의 경계에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내면의 내가 가장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풀기 어려운 문제’를 뜻한다. 고르디우스 매듭을 푸는 행위는 ‘난해한 문제를 해결하다’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은 BC 800년 전 고대 국가인 프리기아의 왕 고르디우스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고르디우스는 자신의 마차를 제우스 신전에 봉안한 뒤 복잡한 매듭으로 묶어둔다. 그리고 이 매듭을 푸는 사람이 아시아의 왕이 되리라는 신탁을 남기게 된다. 이에 매듭을 풀기 위해 수많은 영웅이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수백 년이 흘러 프리지아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Alexander) 대왕은 고르디우스의 매듭에 얽힌 이야기를 듣고 제우스 신전을 찾아가게 된다. 알렉산더 대왕은 수많은 시도에도 매듭이 풀리지 않자, 칼로 매듭을 잘라 버렸고 이후 실제로 아시아를 정복하게 된다.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방식으로 속박을 벗어난 것이다.
불을 따뜻하게 쬐려면 거리가 필요하다. 사람 관계도 마찬가지다. 너무 다가가면 뜨거워서 다치게 되고, 너무 떨어지면 불로서 기능을 잃어버린다. 상대를 바라볼 때 존중이라는 적당한 거리의 따뜻함이 필요하다. 거리를 지킴으로서 더 오랜 관계를 유지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까, 너도 이만큼 줘.’ 바라는 게 사람의 심리다. 하지만 신용과 신뢰는 다르다. 신용은 담보가 있어야 하지만, 신뢰는 무조건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신뢰는 더 큰 마음 나누기를 한다.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가는 노력은 할 수 있지만, 물을 먹고 안 먹고는 상대의 영역이다. 의미는 내가 나에게 주는 것이다. 말을 물가에 끌고 가는 사람이 나인지, 끌려가는 사람이 나인지에 따라 경계의 의미도 달라진다. 자기중심적이라는 그것과 경계의 분리는 다르다. 타인의 경계에 침범하는 그것이야말로 자기중심적 발상이다. 타인의 경계에 침범한다는 것은 수평적인 관계로 보는 것이 아니라, 수직적인 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나는 나로 살아야 한다.
공동체 생활에 개인주의나 이기주의를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타인의 시선을 버려야 온전한 나로 살 수 있다.
회사 생활하는 나는 몇 년 전 주식투자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내가 하는 진정한 투자가 아니라 타인이 하는 투기였다. 흘러넘치는 정보들, 그 많은 정보를 듣고 공동의 정보를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착각은 상대에게 기대는 투자였다. 지인이 말하는 정보로 투자해서 큰 손해를 입었다. 문제는 똑같은 문제로 한 번 더 큰 손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선택의 결과는 자신 몫이지만 타인 평가로 자신 의지와 소신 없는 투자를 한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손해를 입었다면 분명 같은 일은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선택한 투자는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고르디우스 매듭을 푸는 속박을 스스로 결정했다. 타인의 시선과 생각을 없애고 자신만의 생각으로 행위를 한 것이다. 사람 관계에서 불을 쬐는 거리도 마찬가지다. 존중이라는 타인의 경계를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난 엄마의 존재를 믿는다.
‘하늘나라에서 바라보고 계신다.’라는 믿음이 나를 지배하는 규율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타인의 눈을 의식하는 시선과는 분명 다르다. 타인에게 인정받기 위한 일은 더더욱 아니다. 내가 나의 길을 가기 위한 이정표, 반듯한 삶을 위한 일이다. 시간이 지나며 깨달은 일이다.
내 얼굴을 주의 깊게 보는 사람은 나뿐이다.
▶ 고르디우스 매듭 사진: 다음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