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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발

by 김바다

삶은 큰 파도보다, 자잘한 물결에 더 자주 흔들린다. 놓친 기차 한 번, 스쳐간 눈빛 한 번, 잠시 멈칫한 발걸음 하나가 우리의 하루를 바꾸고, 때로는 인생의 결을 달리한다. 간발의 차이는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작지만, 그 틈새는 운명을 갈라놓는 심연처럼 깊다.


그러나 놓침은 결코 허무의 다른 이름만은 아니다. 그것은 비워진 자리에서만 피어나는 또 다른 가능성이며, 우리가 끝내 지켜야 할 마음을 비추는 창이다. 기차를 놓치는 동안 붙잡은 손길, 잠시 멈추어 선 순간의 떨림이 오히려 더 오래 우리를 살아 있게 한다.


삶은 언제나 완벽히 맞물리지 못한 채 흔들리며 흘러간다. 중요한 것은 모든 간발을 채우는 일이 아니라, 그 사이의 간극에서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는지, 어떤 마음을 놓치지 않았는지이다. 결국 인간의 삶은 놓침 속에서 더 깊어지고, 기다림 속에서 빛을 배우며, 붙잡을 수 없었던 것들 위에서 또 다른 의미를 피워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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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승강장에서)


여 연


간발의 차이로 기차를 놓쳤다


간발의 발은 얼마나 작은 것일까

간발의 차이는 얼마나 큰 것일까


1분만 일찍 나왔더라면 다리가 5센티미터만 길었더라면 발사이즈가 245였더라면 계단을 올라오는 사람들 수가 조금만 적었더라면 사람들이 오른쪽 통행 규칙을 지켰더라면 계단을 내려가는 내앞을 막은 이가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떨리는 걸음으로 주춤거리며 쓰러질듯 휘청거리는 노인을 부축하지 않았더라면 나는기차를 탈 수 있었을까


내가 놓친 수많은 간발이

내 앞에서 벽을 친다


긴 꼬리 기차 떠나고

긴 꼬리 장마 오기 전


기차도 사람도 없는 승강장

정적이 축축하다

<꽃으로 와서 바람으로 지다, 여연 시집. P74 지하철 승강장에서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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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발의 차이’라는 일상의 사소함을 통해 인간 존재의 불가피한 한계와 우연의 무게를 보여준다. 기차를 놓쳤다는 작은 사건이 사실은 수많은 조건과 우연, 타인의 몸짓과 규칙, 나의 신체적 조건, 그리고 선택의 순간들이 얽혀 만들어진 결과라는 점을 시인은 예리하게 포착한다.


- 사소한 것의 거대한 무게


‘발사이즈 245였더라면’, ‘계단을 막은 이가 할머니가 아니었더라면’ 같은 구체적 장면들은 일상의 미세한 변수가 우리의 삶을 바꾸어 버리는 아이러니를 보여준다. 간발의 발은 작지만, 그 차이는 삶의 길목에서 커다란 벽이 되어 다가온다. 시인은 그 벽 앞에 서 있는 무력한 자신을, 그러나 동시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숙명적 상황을 담담히 그려낸다.


- 우연과 선택의 교차점


특히 노인을 부축하지 않았다면 기차를 탈 수 있었을까 하는 자문은, 단순한 아쉬움을 넘어선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인간적 선택은 곧 손실을 동반하고, 손실은 다시 삶을 더 두텁게 만든다. 놓침 속에서 시인은 오히려 자신이 놓치지 않은 것 '타인의 어깨를 붙잡아 준 따뜻한 순간'을 드러내는 셈이다.


- 정적의 풍경


마지막 장면, “긴 꼬리 기차 떠나고 긴 꼬리 장마 오기 전 / 기차도 사람도 없는 승강장 / 정적이 축축하다”는 결말은 놓침의 허무를 넘어, 존재 자체가 잠시 머무는 고요의 순간을 서정적으로 그린다. 축축한 정적은 허망함이자, 동시에 삶의 빈틈을 감싸는 시간의 질감이 아닐까?


여연 시인의 '지하철 승강장에서'는 단순히 지하철 승강장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이 아니라, 우연과 선택, 타자와 나, 시간과 삶의 간극을 섬세하게 은유한 작품이다. 작은 발끝의 차이가 거대한 삶의 울림으로 번져가는 과정을 시인이 촉촉한 어조로 담아내고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놓친 기차’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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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연 시인이 쓴 시에는 자신의 삶이 반영된다.

시집을 읽으면서 먹먹한 마음이 드는 건 사실이다. 어머니와의 삶, 먼저 간 형제의 그리움, 꽃이 피고 지고의 그리움을 상징화한.


시집을 덮으며 어머니를 생각한다.

덥고 뜨거운 햇빛의 얼굴을 한 하늘을 바라본다.

아! 눈이 부시다.


#꽃으로_와서_바람으로_지다 #여연 #여연시인 #우리시_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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