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정말 소중한 사람은 누구인가?
내 안의 너- 세상에 시들지 않는 싱싱한 꽃도 있다
흐르는 밤공기를 가르며 나아가는 너는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야!’라는 그녀의 말을 떠올렸다. 우리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호흡과 같은 것, 여름날 햇빛이 노란 부리로 내리쬐던 정오의 숨 막히는 뜨거운 숨결도 사랑할 수밖에 없다며 그녀를 떠올렸다.
차가운 입김을 뱉어내는 보도블록 위를 걸어,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호주머니 속 동전들은 그녀를 만나러 가는 따뜻한 비명을 질렀다. 정류장 앞엔 언제나 우리의 사랑을 확인하는 플라타너스는 팔을 벌려 서 있었고, 한순간도 잊지 않겠다는 가로등은 눈도 깜박이지 않고 웃었다. 버스를 기다리며 너는 언제나 습관처럼 마음속으로 ‘사랑해’를 되뇌었다.
“있잖아, 마음에 처음 자리 잡은 사랑은 그 사람의 행동을 이끌고 가는 무서운 힘이 있다. 한 번 마음을 뺏기고 나면 아무리 좋은 사람을 만나도 잊히지 않아!”
정류장 나무 의자에 앉으면 고요한 밤을 만질 수 있었다. 그렇게 밤은 푸근한 아침을 가져다주었고, 낮은 또 사람들과 함께 떠나갔다. 회상이라는 이름의 잔을 들며 녹아든 슬픔의 크기는 작아졌고 색은 바래어져 갔다. 그가 잊지 않은 건 약속이었다. 그 약속을 말하는 눈빛은 담담한 호수의 물로 일렁거렸다.
가슴에 용광로를 두고 쇳물을 끓인 시간과 불이 꺼져 흔적만 남은 용광로의 시간을 말하며, 그는 용광로는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다는 말만 되풀이하였다. 논리가 사라진 투명한 머리를 향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과 부딪히는 잔을 들고 술을 마시는 일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난 말하지 않았다. 마음에 담긴 무게들을 들어내는 그에게 들어주는 일이 위안이 아닐까? 벽에 걸린 달력만 우두커니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십 대에 만나 서른 해를 보낸 그의 말을 어지럽히는 건 순수함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바다와 함께 삶을 살아온 그를 만나 내가 해준 건 고작, 귀로 듣지 않고 마음으로 들어주는 것이었다.
“책 읽는 것 좋아하니, 책 사는 데 써라 친구야!”
두툼한 봉투 하나를 건네고 마지막 술잔은 일어나 마시고 떠났다.
그에게는 바다 냄새가 났다.
소리를 귀로만 듣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다. 가을밤 갈대가 서걱거리는 걸 소리로 들으면 그저 바람 소리에 불과하지만, 마음으로 들으면 울음소리가 난다. 귀는 소리로 듣지만, 마음은 의미를 듣는 것이다.
휘청이는 배에서 마지막으로 의지할 수 있는 건 커다란 닻이다. 배에서 가장 무거운 것도 닻이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휩쓸리지 않고,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가기 위해 의지할 수 있는 버팀목이다.
우리에게는 자신만의 닻이 있다. 마음속에 비바람이 몰아칠 때 고통을 가라앉혀주고 쉴 수 있게 해주는 커다란 닻이 있다. 그에게 닻은 분명 그녀이다. 닻은 희망을 불어넣는다. 모든 것을 잃어도 물러서지 않게 해주는 힘이다.
전부를 건 그는 ‘내 안에 너 있다!’라는 말을 심장 속으로 갈무리하고 떠난 것이다. 마지막 남은 술잔을 비우며 웃는데 눈물이 흘렀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 갑자가 되어 가는 그의 심장은 여전히 남겨진 반쪽으로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지은 『도망((悼亡)』, ‘아내를 잃고서’라는 시가 생각났다.
어떻게 하면 저승의 월하노인에게 애원할까
다음 세상에는 그대가 남편으로, 내가 아내로 바꿔 달라고
나 죽고 그대 살아 천 리 밖 떨어진다면
그대가 이 슬픈 내 마음 알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