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

by 온수ONSU

우리는 ‘손해’라는 말을 지나치게 쉽게 사용한다.
남들보다 늦어 보이는 선택, 또래가 이미 획득한 지위나 타이틀을 갖지 못한 상태, 안정적인 수입과 생산적인 노동의 궤도에서 벗어난 삶을 두고 사회는 그것을 손해 보는 인생이라 규정한다. 이 기준은 마치 자명한 진실처럼 반복되지만, 그 판단의 근거가 누구의 이익 위에 세워졌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그러나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감각과 존엄을 조금씩 마모시키는 삶이야말로 가장 큰 손해다.

통장의 숫자가 아니라, 자신의 판단과 감정을 스스로 검열하며 살아가는 상태가 문제의 핵심이다.

기득권이 설계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무난한 부품으로 길들이는 순간,

우리는 실패가 아니라 자기 포기의 단계가 된다.


영화 〈다음 소희〉는 우리 사회의 가장 어두운 단면을 조용히 드러낸다.

보호받아야 할 청소년과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들인 초년생들이,

이미 굳어버린 시스템 속으로 편입되며 점점 벼랑 끝으로 밀려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이야기가 더욱 무겁게 다가오는 이유는 그것이 허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반복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늘 같은 말을 반복한다.
학교의 명예를 위해서, 조직의 평판을 위해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안정을 위해 지금의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고.

시스템의 질서에 순응하는 것이 결국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안전’은 언제나 개인의 몫으로만 요구되고, 그 대가로 얻는 이익은 위로 흘러간다.

거대한 구조 속에서 꼬리가 되어 소모되는 삶이 과연 합리적인 선택일까.

비록 불안하고 불확실하더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존재로 서는 것이, 오히려 더 현실적인 태도일 수 있다.

시스템에 적응하는 것이 곧 성숙이라는 믿음은, 책임의 방향을 개인에게만 전가하기 위한 오래된 논리일지도 모른다.

물론 익숙한 궤도에서 벗어나는 일은 쉽지 않다.
‘아니요’라고 말하는 순간, 개인은 곧바로 문제적인 존재가 된다. 차가운 시선과 의심, 때로는 노골적인 비난이 뒤따른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압박 역시 구조의 일부다.

그래서 끝내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지금 이 선택은 정말로 나 자신에게 떳떳한가.

세상이 말하는 손해와 실패의 기준에 휘둘리지 않고, 자신의 영혼을 지키기 위해 내린 선택은 겉보기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가 아니라, 자기 삶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갈려 나가는 부품이 아니다. 각자의 감각과 속도를 가진 존재이며,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가 있다. 비록 그 선택이 사회가 설정한 정상 궤도에서 벗어나 있을지라도, 자신에게 정직한 길을 택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시스템의 희생자가 아니라, 자기 삶의 주권자가 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삶은 잃어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