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좇는 사람과 기다리는 사랑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시각디자인과 합격 소식을 받았다.
기뻤다.
사실 면접을 마치고 난 뒤부터 어쩐지 붙을 것 같다는 예감이 있었다.
그래서 떨어지더라도 크게 후회하지는 않을 것 같았고,
막상 결과를 받았을 때도 기쁘면서도 이상하리만큼 담담했다.
오히려 더 인상 깊게 남은 건 부모님의 반응이었다.
나의 도전이 좋은 결과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이 선택이 나만의 일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그 순간이 조금 뿌듯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쯤 뒤,
토익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어쩌다 당근마켓을 통해 알게 된 분이었다.
두 달 동안 주말마다 한 번씩, 두 시간씩 나는 무료과외를 받았고
나는 품앗이하듯 작은 선물이나 카페 음료를 사 드렸다.
그분의 정확한 직업이나 다니는 회사 이름은 알지 못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 굳이 묻지 않았다.
다만 중국어를 잘한다는 것, 퇴근 후에는 운동을 한다는 것,
해외 출장이 잦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그분이 삶을 대하는 태도였다.
주말에 자신의 토익 공부를 할 겸,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며 무료로 과외를 해주는 점에서
‘갓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성취를 향해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기운을 가까이서 느끼고 싶었고,
그 영향 속에 나도 조금은 닮아가고 싶었다.
근묵자흑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 덕분에 670점이던 점수는 730점으로 올랐다.
마지막 수업 날에는 밥을 먹으며 서로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조금 나눴다.
그리고 거기서 탄수화물을 유독 좋아한다는 신기한 취향도 기억에 남았다.
그 뒤로는 이사도 하고, 각자의 삶에 집중하다 보니
연락할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시각디자인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밥 한 끼 대접하고 싶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선생님은 흔쾌히 좋다고 하셨고,
다음 주말에 서울에서 보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남자친구와 통화하며 꺼냈을 때,
나는 그의 목소리에서 순간적인 불안을 눈치챘다.
그 선생님은 나보다 아홉 살 많은 남성이었다.
앞선 통화 분위기가 좋아서
이 타이밍에 괜히 말했나 싶어 잠시 후회가 들 무렵,
남자친구는 몇 달 전 내가 이별을 이야기하던 시점에
그 선생님과 나눴던 한 대화를 떠올렸다고 했다.
그때 내가 연애와 결혼관에 대해 이야기하고 온 이후,
그리고 결혼에 대해 남자친구에게 묻기 시작하면서
내가 흔들리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
자신에게는 꽤 큰 고통이었다는 말이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금 더 과거로 돌아가 보면,
나는 남자친구가 졸업 후 나처럼 사회로 나올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학위를 위해, 그리고 더 공부하고 싶다며
학교에 남는 길을 택했다.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기회는 온다고 믿는 나에게,
부딪히고 깎이며 전문성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그의 선택은 답답하게 느껴졌다.
스물여섯, 어느새 5년이 되어가는 연애 속에서
나는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딩크에 대한 생각도 오히려 더 컸지만
그럼에도 ‘결혼을 한다면 너와 할 것’이라는 마음에는
의심이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해졌다.
나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는 건지,
나와의 미래를 더 이상 상상하지 않는 건지.
그 의문은 결국 그를 시험하고 싶은 마음으로까지 이어졌던 것 같다.
그런 마음을 안은 채,
일 때문에 원주 변두리로 이사를 왔다.
원주에서의 삶은 생각보다 훨씬 치열했다.
공사 현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며 인부들 사이에서 집을 고쳤고,
집 안팎을 손보는 와중에도 일을 멈출 수는 없었다.
대출을 받아 차를 사고, 운전 연수를 받고,
밀린 업무까지 어떻게든 해냈다.
그 고단한 시기에 남자친구가 던진
“멀어져서 힘들다”는 말은
부채감처럼 마음에 남았다.
나는 그의 군대를 기다렸던 시간만큼
왜 그는 내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시간을
기다려주지 못할까,
그 생각이 야속하게 들었다.
결국 나는 모든 관계를 끊고
혼자만의 동굴로 숨고 싶어졌다.
“날 좀 내버려 둬.”
그래서 헤어지자고 말했다.
며칠 뒤,
원주까지 기차표를 끊고 나를 보러 온 너를 보고
나는 완전히 무너졌다.
울어서 상해버린 얼굴을 마주하며
그제야 알았다.
나는 너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네가 나 때문에 이렇게 슬퍼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말이 아니라 감정으로 전해졌고,
내가 너에게 얼마나 큰 존재인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내가 헤어지자고 한건 남자친구가 싫어져서가 아니였다.
네가 스스로를 돌보며 더 강해지기를 바랐다.
내 세계가 넓어지듯,
너의 세계도 확장되기를 바랐다.
그 안타까움과 미안함 끝에
이번 생은 나를 위해서,
하지만 너를 위해서도
정성을 다하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다시 전화 통화로 들려오는 너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안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너에게
나는 언제 어디로 떠날지 모르는
불안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
늘 곁에 머물러주길 바라는 너의 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자유를 찾아 떠나려는 것이
내 운명처럼 느껴지지만,
그 이기적인 마음 한편에는
이토록 넓은 세상을 유영하다
결국 돌아올 곳이 너이길 바라는 욕심도 있다.
그래서 네가 이 만남을 통제하지는 않지만
내심 좋아하지 않는 마음을 이해한다.
내가 더 멀리 나아가는 것을 축하하면서도
너무 멀어지지는 않기를 바라는
모순적인 사랑 속에서
나는 오늘도 나의 자유와 우리의 사랑 사이를 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