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의 묘미
회원님. 몸에서 힘 빼세요. 그래야 공이 멀리 나가요.
팔심으로 치는 게 아니고, 몸의 원심력과 회전력을
이용하는 거예요.
욕심 내려놓으시고,
닷새 굶은 것처럼 그냥 툭 치시면 돼요.
골프 코치에게 10개월 동안 들었던 말이다. 친구들보다 한참 늦은 나이에 시작한 골프였다. 나는 귀족 골프 논란, 골프장과 환경문제 등 안 좋은 말들을 많이 들어온 터라, 애초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골프에 푹 빠진 어릴 때부터 친구가 집요하게 함께 하자고 조르며, 중고골프채까지 구해주었다. 대중화도 많이 되었고, 골프가 뭐길래 그리 재미있어하는지 한 달만 해 보기로 했다. 마침 직장에서도 막히고 꼬이는 일이 많아 스트레스가 최고치였다. 뭔가 색다른 돌파구가 필요했다.
골프 코치는 나를 처음 보자마자 힘을 빼라는 말부터 시작했다. 그는 10개월 내내 그 말을 반복했다. 골프 세계로 입문하고 보니, 골프 치는 누구나 그 말을 입에 달고 있었다. 적절히 힘을 주는 구간이 있지만, 어쨌든 기본은 힘을 빼는 것부터였다. 몸에 힘을 뺀 상태에서 골프채를 들고 약간 삐딱하게 적당한 각도와 자세를 취한 뒤, 몸을 회전하면서 채를 휘둘러야 공이 멀리 나간다고 했다. 제대로 힘을 빼고 골프채를 휘두르는 선수들의 모습은 우아했다. 나는 힘을 빼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면서 매일 기본자세를 익혔다. 한 달 정도 연습을 하다 보니, 채와 함께 온몸을 휘두르는 데서 오는 쾌감이 느껴졌다. 공이 채의 헤드에 잘 맞을 때 나는 딱! 소리도 기분 좋았다. 땀에 흠뻑 젖어 연습을 마치면 그 또한 개운함으로 다가왔다.
나는 자연스럽게 ‘힘을 빼라’는 말을 속으로 읊조리며 공을 쳤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결에 직장에서나, 일상생활에서도 나는 ‘힘을 빼라’고 나에게 계속 반복하고 있었다. 힘을 빼고 업무를 하다 보니, 분위기도 좋아지고, 한결 여유가 생겼다. 힘을 빼니, 욱하고 올라올 일도 허허롭게 넘어갈 수 있었다. 한 번은 큰 행사를 준비하는데, 전년에 비해 예산도 줄어들고, 홍보할 시간도 적어서 걱정이 컸다. 담당자는 더욱 힘이 빠져 있었다. 전년도보다 더 나은 성과를 내야 하는 것이, 모든 사업의 불문율 아닌가. 나는 팀 회의를 시작하면서 우선 크게 한 번 심호흡하며 몸과 마음에서 힘을 뺐다. 예산이 적으니, 작년보다 성과가 적어도 어쩔 수 없지요. 누구 탓은 지금 이 자리에서만 우리끼리 실컷 하고 끝냅시다. 그리고 지금의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보아요. 우리 서로가 힘이 되는 수밖에요. 다른 부서에도 협조 요청할게요.
예산이 적으니, 되도록 일회용을 없애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신경 쓰자고 팀원들이 마음을 모았다. 행사에 참여하는 기업들에도 상황 설명을 하고, 협조를 구하기로 했다. 나머지는 몸으로 때우자고도 했다. 타 부서 동료 직원들이 행사일에 자발적으로 지원도 해주었다. 행사는 뜻밖에 성황을 이루었다. 작년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입소문도 동원해서 행사장을 찾아주었다. 우리는 전년도보다 더 좋은 결과를 보고서에 쓸 수 있었다. 동료들은 나의 골프 연습을 응원했다.
화날 때 특히 힘을 빼. 그러면 덜 늙어.
힘을 빼고 욕심을 버린 덕이
일상에서 나에게 응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10개월 후에, 골프연습장을 옮겼다. 새 골프연습장에서는 마침 코치를 구하는 중이라 코치가 없었다. 나는 코치 없이 연습했다. 점점 온몸에 힘이 들어가고, 나도 모르게 더 멀리 치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기어이 잘못된 자세로 힘을 주며 골프채를 휘두르다가 허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몸과 마음에 힘이 잔뜩 들어간 결과였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허리가 아프면 생활의 질이 얼마나 떨어지는 지를 8개월 동안 징글징글하게 경험했다. 정형외과와 한의원을 드나들었지만, 허리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결국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의 권유로 수영을 시작했다.
회원님, 몸에서 힘을 빼세요. 그래야 물 위에 떠요.
음파 호흡으로 폐 속에 공기를 60% 이상 보유하고
몸은 유선형 자세, 스트림 라인(stream line)으로
유지하세요.
수영 코치가 초보자들에게 해주는 코칭이다. 수영의 기본은 호흡과 물에 뜨는 것이다. 초보자들은 대부분 쉽게 몸에서 힘을 빼지 못한다. 빼는 방법을 모른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 나 역시 물에 빠질 것 같아 처음에는 나도 모르게 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 한참을 계속 물을 먹고, 제자리에서 허우적거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을 내려놨다.
몸에서 힘을 빼보자.
빠져봤자 0.9미터이니 죽지는 않는다.
잔뜩 긴장한 몸을 이완시키고, 차츰 킥보드에 의지해 몸을 띄우면서, 몸에서 힘 빼는 방법을 조금씩 익힐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또다시 내 몸에게, 내 머리에게 힘을 빼라고 반복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골프 연습할 때처럼. 하지만 아직도 내 마음대로 힘을 빼려면 멀었다.
제대로 힘을 빼는 것은 몸에서도 빼야 하지만,
마음에서도 빼야 한다.
수영을 하고 석 달 정도 지난 때였다. 초급반 내에는 두 개의 클래스가 운영된다. 신규와 초급. 내가 신규 클래스에서 수영의 기초를 익히고 있을 때였다. 신입 수강생들이 대거 들어왔다. 코치는 신규 클래스에서 몇 사람을 초급클래스로 승급시켰다. 그런데 그들 중 두 사람을 보면서 나는 기분이 나빠졌다. 나와 비슷한 시기에 수영을 시작해서 수준이 비슷한, 어쩌면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그들만 초급클래스로 옮겨간 것이다. 내가 보기에 나와 다른 점은 삼십 대 정도의 어린 여성들이라는 점이었다. 나는 속으로 가뜩이나 나이 먹은 것도 서러운데 코치는 젊은 사람만 좋아하나 보다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가장 꼰대스럽다고 혐오하던 그 말을 내가 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그들이 초급클래스 레인에서 누들 튜브를 두르고 배영 연습하는 모습을 곁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의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우고, 가시마다 질투 어린 눈을 달고서. 그날 나는 수영 연습을 망쳤다. 누들 튜브로 수영하는 모습이 체기처럼 계속 머릿속에서 어른거렸다.
며칠 동안 기분이 나빴다. 그 후 나는 유튜브를 보면서 열심히 자유형 호흡과 자세를 공부했다. 실력을 보여주리라 다짐하며. 두 주 후쯤 나도 초급클래스로 옮겨갔다. 나는 그때 알게 되었다. 자세나 호흡은 내가 나을지 몰라도, 그녀들은 나보다 힘이 좋아서 자유형 발차기를 잘했다. 한마디로 나보다 빨랐다. 수영은 개인 스포츠다. 선수가 아닌 이상, 누구를 비교 대상으로 삼아 이길 필요가 없다. 자신에게 맞는 호흡법과 속도, 바른 자세를 익혀서 물속에서 즐기면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치게 된다. 그런데 나는 습관적으로 나 혼자 경쟁을 벌이고, 어리석은 질투를 하고 있었다. 심지어 자격지심에 겨워서 나의 며칠을 온통 허비하기까지 했다.
지금 나는 중급클래스로 억지 승급당한 지 한 달 정도가 되었다. 신규회원이 갑자기 늘면서 나 같은 초급클래스 고인물들이 어쩔 수 없이 밀려 올라간 것이다. 초급클래스 풀장의 0.9미터 깊이가 어린이 놀이터였다면, 턱밑까지 오는 1.3미터 대형 풀장은 본격적인 수영의 세계를 의미한다. 그 깊이와 물살의 압박을 이겨내야만 한다. 초급클래스에서 나는 고인물답게, 살짝 여유를 갖고 제일 앞서서 수영 연습을 했다. 하지만 중급클래스로 강제 승급 당한 후에는 선배 회원들 맨 꼬리에 매달려 따라가느라 헉헉대고 있다. 이때 자칫 욕심을 부리면 다친다고 선배 회원들이 한 마디씩 거든다. 나도 너 같은 때가 있었다고. 그렇다 보니 다른 회원들에게 최소 민폐는 되지 말아야 해서, 따라가랴, 연습하랴, 눈치 보랴, 바쁘다. 하지만 어쩌랴. 이제야말로 본격적인 수영의 세계로 들어선 것 아닌가.
가끔은 과분한 기회가 올 때도 있다. 그러면 바로 마음을 비우고, 가장 겸손한 자세로 선배들께 배워야 한다. 바로, 힘을 빼야 하는 때이다. 하루는 골프 코치가 물었다.
회원님, 골프가 재미있으세요?
골프에 내가 좋아하는 철학이 있어서 좋아요.
철학요?
힘을 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