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꿈의 대학생이 되다.
2000년 2월 중순. 갓 스무 살이 된 나는 누군가가 내게 나이를 물어보는 게 좋았다.
“올해 몇 살이니?”
“스무 살이요.”
스무 살.. 을 발음할 때의 치경 마찰음(alveolar fricative) 소리가 좋았다. 혀끝과 치경(잇몸) 사이의 간격을 좁힌 후 좁혀진 혀끝과 치경 사이를 강하게 마찰시켜 강하게 내뱉는 스(S)...... 스(S)....... 사운드. 그 뱀 소리 나는 치찰음 소리가 그 나이대에만 누릴 수 있는 특권 같은 느낌이었다.
스무 살. ‘나는 젋다’ 나는 어리다 ‘ ’ 나는 청춘이다 ‘라고 온몸에서 에너지를 발산한다. 그래서 한껏 꾸미지 않아도 한창 이쁠 나이. 수수하게 청바지에 흰 티만 툭 걸쳐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나이.
그래서 그때 난 있는 그대로 당당했다. 화장기 없는 맨 얼굴에 그 당시 유행했던 머리띠(책 분철할 때 사용되는 스프링 같은 모양의 머리띠)로 머리를 올빽으로 넘긴 데다, 렌즈를 낄 생각도 없이 커다란 금테 안경을 고지식하게 쓰고 있었다.
2월 중순이어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열흘이 조금 넘었던 시점이라 머리 길이가 아직도 귀밑 2센티미터였다.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는 머리 길이 제한이 엄격해서 졸업 후 머리를 기른다고 길렀어도 짧은 단발을 벗어나지 못했다. 말이 좋아 단발이지, 사실상 뒤에서 보면 목까지 이어지는 부분이 시퍼렇게 보여서 새내기 여대생의 느낌과 결코 어울리지 않았다.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앞으로 4년간 함께 할 학부생 동기들이 한 명씩 눈에 들어왔다. 그중, 긴 웨이브 파마머리를 멋들어지게 소화하는 여자아이가 눈에 띄었다. 윤기 나는 탐스러운 머리카락을 어깨 한쪽으로 쓸어 넘기며 까르르 웃는 그 여자아이의 오렌지빛 입술에선 정말 오렌지 향이 날 것 같았다.
시퍼런 내 목 뒷덜미가 더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 에이~ 이게 모야. 나만 고등학생 같잖아. OT라고 다들 이쁘게 하고 왔구나. 어떻게 저렇게 잘 꾸밀 수 있지?‘
그 여학생은 남학우들에게 둘러싸인 채 연신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귀를 쫑긋 세워 들어보니, 이미 대학교 합격자 발표날부터 포털 사이트 카페를 검색해서 선배들 및 합격생들과 연락을 하고 있었던 듯했다. 온라인에서의 이어온 활동을 공유하며 오프라인에서의 새로운 관계를 유난 맞게 시작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끼어들 틈이 전혀 없어 보였다.
나는 백여 명의 영어학부 신입생과 선배들 사이에서 잘못 배달된 우편물처럼 앉아있었다. 바로 한 학번 위의 선배들인 99학번과 신입생들이 빨리 친해지도록 선배들과 신입생들을 섞어 8명씩 한 조로 편성했다. 각 그룹은 OT가 이루어지는 커다란 강당에서 동그란 모양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활발하고 유쾌한 선배들이 있는 집단은 OT 내내 시끌시끌했다. 유독 낯을 가리고 조용조용한 성격의 나처럼 내가 속한 그룹원들은 유독 조용했다. 서로들 무슨 얘기를 해야 하나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뒤에서 내 어깨를 가볍게 톡톡 두드렸다.
“근데 아까 그 책 말이야. 저자가 누구라고?”
“아.... 도스토예프스키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아시죠? 그 저자예요. 아까 제가 자기소개할 때도 말했지만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죄와 벌’이거든요.”
“원래 신입생 OT 때 자기소개하면서 책 얘기 안 하기도 하지만 그런 문호를 언급하기도 힘들지.”
“제가 좀 튀었나요? 괜히 분위기 망친 건 아닌가 몰라요.”
“아니야 아니야, 뭘 망쳐. 것보다는 우리 게임하고 있어서 잠깐 도와주지 않을래?”
처음 본 선배의 손에 이끌려 게임을 하고 있는 그룹으로 이동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죄와 벌’이라고 불리게 될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자기소개 때 ‘죄와 벌’의 임팩트가 강해서 내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내가 지나갈 때 ‘쟤가 그때 죄와 벌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선배가 데리고 간 그룹은 선배가 속한 그룹이었다. 선배네 그룹은 게임을 하면서 친목을 다지고 있었는데 선배가 벌칙에 걸려 다른 그룹에서 여학우 데려와야 하는 상황이었다.
선배는 “잠깐만 이거 물고 있어 봐.”라며 새우깡 하나를 내 입에 넣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이내 TV에서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게 그 게임인가?’
“우리 팀에서 게임 벌칙으로 새우깡 게임을 해서... 잠시 양해를 구할게.”
선배의 숨소리가 가까이 다가왔다 사라져 갔다. 부지불식간에 새우깡이 댕강 반 토막 나 있었다. 다들 손뼉 치고 웃고 하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선배는 머쓱하게 웃으며,
“여기 99학번 손우진, 김성은, 양은희, 그리고 00학번은 아까 각자 소개를 했었는데... 아, 그리고 이쪽은 아까 그 ‘죄와 벌’ 친구. 같은 00학번이야.”라고 선배네 그룹에 나 대신 인사를 해주었다.
어색한 인사 후 내 자리에 돌아와 앉았다. 우리 그룹은 나와 선배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던 터라 내가 돌아왔을 땐 이야기를 시작할 소재 하나가 생겨서 신이 난 모양새였다.
“그거 알아? 아까 너 데리고 간 선배 말이야. 우리 영어 학부... 학부장이라던데!”
“아, 그래? 그렇구나.”
“근데 첫날부터 새우깡 게임이라니. 괜찮아?”
“어? 어.... 근데 넌 이름이?” 갑자기 창피해져서 화제를 전환했다.
“나? 김혜선. 아, 그리고 이 친구는 유아영이라고 해. 아까 자기소개 때 고무신 이야기 한 친구 기억나지?
”아~ 고무신! 기억나지. “
넉살 좋게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준 혜선이라는 친구가 옆 그룹의 아영이를 소개해 주었다. 신입생 자기소개 시간에 나만큼이나 임팩트 강하게 자기소개를 했던 아이였다. 전라남도 고창에서 왔다며 운동화보다는 고무신이 편하다는 아영이. 실제로 흰색 고무신을 신고 와서 자기소개 때 고무신을 들어 보이던 모습에 어찌나 다들 박장대소했던지. ‘저 친구 괴짜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나와 기질이 정말 다르구나’ 싶으면서도 ‘더 친해지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겼다.
확실히 대학에 오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신입생 자기소개 때만 봐도 서울,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이들 왔구나 싶었다. 더욱이 영어 학부인 데다 학교 특성상 외국인이 많아서 우리 과에는 신입생 중에 일본인도 다수 있었다.
스무 살. 엄마 아빠 품을 떠나 타지에서 시작하게 된 대학 생활을 이 친구들과 어떻게 펼쳐 나갈지 너무나도 기대가 되는 밤이었다. 그렇게 나의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