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여름

I. 꿈의 대학생이 되다.

by 차은서

2. 기숙사 생활


#Entry 1. 기숙사 첫날.


‘서울의 달’(1994년 1월~10월까지 방영된 주말 드라마)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서울의 달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이다. 그 당시 난 우리 동네와 같은 이 드라마 속 배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민들의 생활상을 담백하게 담아내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였다지만 너무도 현실을 잘 반영하여 그 현실 속에 살고 있던 나는 드라마에서조차 그런 일상들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언덕을 하나 넘어가면 또 다른 언덕이 나오고 그 언덕을 다 올라가면 언덕 정상에 우리 집이 있었다. 방과 방에서 주방으로 이어지는 마루가 있고, 마당 옆에는 이름 모를 아저씨가 사는 방이 있고, 그 맞은편에 작은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그런 집. 언덕이 높아 비가 억수같이 거세게 내려도 우리 집은 쉬이 잠길 것 같지 않았다. 폭우로 인한 재난재해 경보 방송을 보고 있어도 우리 집은 달리 걱정되지 않았다. 다만, 한 겨울 눈이 소복하게 쌓이는 날에는 아버지 차가 미끄러지지 않기를 바랐던 기억과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매어 놓은 밧줄을 잡고 슬금슬금 언덕길을 내려갔던 기억이 있다.


어렸을 때는 다 우리 집 같은 줄 알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4학년 1학기가 끝나갈 무렵, 내가 2년 동안 좋아하던 남학생이 학교를 떠날 때야 비로소 ‘다 우리 집 같지 않구나’ 어렴풋이 체감하게 되었다. 아파트촌 학부모들이 ‘더 이상 달동네 아이들과 학교를 같이 다니게 할 수 없다’며 아파트촌 내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이동시켰던 때였다. 어린 내가 봐도 누가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인지 누가 우리 동네 아이들인지 구분 가능했다. 서러웠던 건 내가 남아 있는 학생들의 무리에 속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떠나가는 이유도 서글펐지만 더 이상 내가 좋아하는 남자아이도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인생에서 처음으로 나의 쓰라린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주어진 환경으로 인해 내가 선택할 기회조차 없을 수 있구나’라는 무서운 사실에 하굣길 발걸음이 무거웠다.


스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달동네를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사한 것은 아니었다. 합격한 대학교가 집에서 한 시간 거리여서 기숙 생활이 가능했다. 한 시간 거리여서 통학이 가능했으나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허락을 받았다. 부모님은 처음으로 아이를 타지로 보내게 되어 걱정했지만 나는 가족과 떨어져 산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되려 이렇게 당분간 떨어져 지낼 수 있는 기회에 감사했다. 앞으로 오롯이 나한테만 집중하고 나만 생각하면서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었다.


기숙사로 입실하는 날 아버지 차에 내 짐을 한가득 실어 온 가족이 대학교로 이동했다. 대학 캠퍼스는 내가 상상한 그대로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대리석 건물에 휴지 조각 하나 없는 깨끗한 캠퍼스. 젊음을 대변하는 듯한 싱그러운 초록 나무가 나란히 줄지어 있는 길을 따라 건물과 건물 사이를 이동하면 푸르른 잔디가 축구장처럼 펼쳐져 있었다. 문득 초등학교 5학년 때 봤었던 청춘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이 떠올랐다. 배우 유호정이 크로스백을 메고 캠퍼스 내 건물 계단을 또각또각 올라가는 장면이 왜 그렇게 인상적이었는지 대학생이 되면 ‘꼭 저렇게 높은 구두 신고 캠퍼스 내를 또각또각 걸어 다닐 거야.’라고 다짐했었다. 어릴 적 그 다짐이 이 캠퍼스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니 정말 어른이 된 것 같은 생각에 콩닥콩닥 가슴이 설레었다.


캠퍼스를 한 번 급하게 둘러본 후 기숙사로 이동했다. 남자 기숙사는 꽤 오래되었지만 여자 기숙사는 신축 건물이어서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새 건물 특유의 기분 좋은 냄새가 났다. 여자 기숙사는 C동과 D동으로 나뉘어 있었고 2층에서 C동과 D동이 연결되는 복도 통로가 있었다. 여자 기숙사 입구 경비실에서 배정받은 방을 확인하고 열쇠를 넘겨받았다. 내가 배정받은 방은 C동 304호. 4인 1실이었다. 선배 2명과 신입생 2명이 구성원이었는데, 입실한 첫날은 낯선 방에서 혼자 잠을 청해야 했다. 입실 기간 중 내가 제일 일찍 온 듯했다.


배정받은 방을 확인하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내 동생은 기념사진을 함께 찍은 후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기숙사 방에 홀로 남으니 갑자기 조용한 기운이 크게 느껴졌다. 어색한 기운 속에서 짐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방 입구 쪽에 마주하고 있는 2층 침대 중 어떤 쪽을 택할지 고민하다 아무래도 신입생이니 2층을 쓰는 게 맞겠지 싶어 오른쪽 2층 침대에 이불을 깔고 침구를 정리했다. 뽀얀 하얀색 바탕에 에메랄드 녹색 줄무늬 이불을 정리할 때마다 ‘사각사각’하는 침대 이불 소리가 났다. 처음으로 침대가 생겨 어찌나 설레고 좋던지. 앞으로 누군가 밤에 전화하면 ‘나 침대에 누워있어’라고 거짓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실을 이야기할 수 있어 좋겠다 싶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것도 잠시. 난생처음으로 가족과 멀리 떨어져서 혼자 잠을 청하다 보니 갑작스럽게 우울감이 밀려들었다. 알 수 없는 감정과 함께 뭔지 모를 슬픔이 느껴져 울면서 잠들었다. 기숙사에서의 첫날은 기대감보다는 우울감과 슬픔 속에서 그렇게 지나갔다.




# Entry 2. 기숙사 입실 일주일 후


4인 1실. 내 기숙사 방.

룸메이트 4명 모두 입실을 마친 상태다. 같은 방 룸메이트 중 선배가 2명, 동기생이 1명이었다. 선배 2명 중 한 명은 타과 4학년 졸업반으로 자주 방에 들어오지 않았고, 2학년 선배는 제주도에서 올라왔다고 했다. 동기생인 1학년 룸메이트는 스페인어과 학생으로 종일 방에서 스페인어 공부만 했다.


19살 때까지 가족들하고만 지내다가 처음 만난 사람들과 룸메이트가 되어 한 공간에서 생활하니 어색함과 불편함도 있었지만 그 보다 좋은 점이 훨씬 많았다. 선배라고 하지만 나이가 비슷한 동시대 사람들과 언제든 이야기를 하며 정보 교류도 할 수 있었고, 같은 과 학생들과 할 수 없는 얘기를 하거나, 선배이기 때문에 언니처럼 응석이나 애교를 부릴 수도 있었다. 난 맏이였기 때문에 늘 언니가 있었으면 했다. 조언을 주거나 공감을 해줄 수 있는 언니.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친언니처럼 다정하게 챙겨주는 룸메이트 언니가 생겨서 너무도 행복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제일 좋았던 건 배고프지 않아 밥 한 끼 걸러도, 아침에 늦잠을 자도, 밤늦은 새벽까지 깨어있어도 뭐라고 잔소리할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사실, 난 기억을 더듬을 수 있는 아주 어린 유년 시절부터 일상을 불행하다 느끼며 지냈다. 밥 한 끼 안 먹으면 당장이라도 죽는 것처럼 세상 진지하고 엄격하게 밥 먹으라고 강요했던 엄마. 젓가락질도 잘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일 때부터 그렇게 무서운 분위기에서 눈치를 보며 밥을 먹었기에 식사하는 자리가 결코 즐겁지 않았다.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 건 우리 집 반찬은 참으로 특이했다는 것이다. 내가 시력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밥상에는 생(生) 소간이 올라와 있었고, 이유는 모르겠지만 천엽도 종종 올라왔었다. 어린 나이에 생 소간에서 나는 비릿한 냄새와 꿀렁거리는 식감이 거부감을 들게 했다. 더욱이 천엽은 회색빛에 돌기처럼 생긴 모양에 쥐 털 같은 느낌을 받아서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음식을 강요에 못 이겨 입에 넣고 헛구역질하다가 엄마한테 맞아서 울기 일쑤였다. 그야말로 식사 시간은 고통의 시간이었다.


내 나이 12살 무렵이었다. 한 번은 생선구이가 밥상에 올라왔다. 엄마가 하얀 쌀밥 위에 생선 가시를 발라 얹어 주었다. 언뜻 봤을 때 가시가 있었던 것 같은데 뭐라고 말을 해봤자 등짝을 얻어맞을 것이 뻔해 그냥 꿀꺽 삼켰다. 음식을 삼키고 보니 목이 이상했다. 가시가 박힌 것이다. 따끔하고 아팠지만 엄마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요란스레 큰 목소리로 엄마가 말을 하면 내가 더 겁을 먹을 것 같은 두려움이 아픈 고통을 짓눌렀다. 그 후 성인이 되어서야 혼자 병원에 찾아갈 때까지 엄마한테 그날의 생선에 대해 말 한마디 꺼내지 못했던 것을 보면 엄마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컸던 듯하다.


어느 날 성인이 되어서 엄마한테 물었다. 어른들에게도 호불호가 있는 음식을 어린아이인 나한테 왜 그렇게 먹으라고 강요했는지. 단지 내가 시력이 좋지 않았고 영양을 위해 천엽도 챙겨주고 했단다. 그 당시에 엄마가 무지해서 아이를 아이로 대하지 못했다고. ‘미안하다’라고 하는 엄마 앞에서 나는 더 이상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이제라도 ‘미안하다’라는 말을 해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이 목구멍에서만 맴돌았다.


내 과거의 일상이 불행까지는 아니어도 행복하지 않았다고 감히 단언할 수 있는 이유가 몇 가지 더 있지만, 그중 가장 주된 이유는 부모님의 다툼이었다. 나의 아버지는 개인택시 운전기사로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패턴이었다. 이틀 일하고 다음 날 쉴 때는 어김없이 옥상에 올라가 연탄불에 삼겹살을 구워 드셨다. 물론 술안주로. 두꺼비가 그려진 초록생 병을 직접 사 오시는 경우도 있었지만 아닐 때가 더 많았다. 동생 또는 내가 그 소주병 심부를 했더랬다. 그 심부를 갈 때마다 발걸음이 무거웠고 종종 불안했다. ‘오늘은 제발 조용히 지나가게 해 주세요’라며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가끔 내 기도가 하늘에 닿지 않았던 날엔, 주사가 있는 아버지 때문에 엄마, 나, 내 동생이 내 좁은 방에서 문 걸어 잠그고 불안한 밤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 폭력으로 이어질 때 나는 엄마를 보호하기 위해 아버지에게 대들었고 그럴 때면 내 목소리와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어떤 때는 집에 있는 물건들로 위협을 받기도 했으며, 둔탁한 것으로 방문을 찍어 내려 그 이후에도 우리는 그 흉한 흔적을 일상 속에서 계속 마주해야 했다. 불안과 두려움, 슬픔 속에서 그렇게 나의 사춘기는 미성숙한 어른들의 오춘기로 인해 방황할 새 없이 흘러갔다.


이렇게 기숙사에 와 있으니 밤에 불안해할 일도, 더 이상 환경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며 눈물 지울 일도 없었다. 같은 하늘 아래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 시간 이상의 거리에 떨어져 있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다만, 아직 한창 사춘기인 중학생 동생이 그 집에 남아 있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같이 짊어지고 있던 짐을 떠넘기고 온 듯한 느낌에 마음이 무거웠다. 온몸이 신경 다발로 뻗어있는 듯 예민한 나와는 달리 동생은 다행히도 둔감했으며 속이 깊은 아이여서 나보다는 잘 지낼 것이라 자위하며 이기적인 선택을 했다. (내가 기숙사로 간 후 동생은 한 달 동안 밤마다 울었고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잘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안정되고 평화로운 기숙사 생활에 마음이 조금씩 평온해지고 있었다. 뜬눈으로 밤새며 불안해할 일도, 아침마다 성난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날 일도, 눈치 보며 밥 먹을 일도, 친구를 만나기 위해 지어낼 구실 거리를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하루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다.


기숙사 방이 4인 1실이라고 불편하다며 투덜대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는 집에서 벗어난 해방감과 처음 느껴보는 자유로움에 기분이 들떠 있었다. 더욱이 같은 방에 언니들과 동년배가 있어 언제든 담소를 나누거나 의지할 수 있었고, 문만 열고 들어가면 어느 방에든 과 친구들이 있어서 언제든 친구들을 바로바로 볼 수 있었다. 친구를 만날 이유를 지어내어 엄마한테 허락받을 필요도 없었고, 만들어낸 구실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었다. 굳이 약속시간을 정하거나 옷을 차려입고 나가지 않아도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한 밤중에 머리도 다 말리지 않은 채 파자마를 휘날리며 친구 방으로 미끄러져 들어가,


"혜선아, 뽀글이 먹을래?"

"비빔면 아님 짜파게티?"


야식을 먹기 시작하면 라면 냄새를 맡은 나머지 룸메이트들도 미리 사놓았던 간식거리를 들고 합류하게 된다. 라면으로 끝날 야식이 파티로 이어지는 밤 우리는 또 하나의 추억들을 쌓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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