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그 여름

I. 꿈의 대학생이 되다.

by 차은서

4. 축제 전야 (1)


축제 첫날인 23일에는 미스 S 선발대회가 개최될 예정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대회에 자원한 사람이 나 말고도 한 명 더 있었다. 참가번호 1번이었는데 쇼트커트에 다소 톰보이 같은 스타일의 여학생이었다. 얼핏 스치듯 보면 코미디언 조혜련을 닮아 '개성 있다'라는 느낌을 주었다.


이번 대회를 주최하는 동아리 측에서 며칠 전 전화가 왔었다. 축제 전전날인 21일에 참가자 전원이 모여 춤 연습을 해야 한다며 학생회관 건물 동방(동아리방)으로 오라고 했다.

아침 일찍 약속한 시간에 맞추어 학생회관 건물 2층 동방으로 향했다. 동방에서는 COOL의 ‘All For You’ 노래가 경쾌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벌써 며칠째 전화도 없는 너~

얼마 후면 나의 생일이란 걸 아는지 눈치도 없이 시간은 자꾸만 흘러가고 ~ ♪♬

활짝 오픈된 동방 문 앞에 서자 동아리 선배 언니들이 반갑게 맞이한다.


“어머, 은서 씨 오셨네요~”


은서 씨... 이 동방 선배들은 나를 “~씨”라고 부른다.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터라 이런 존칭어를 들으면 상당히 어색했지만 부담스럽지 않았다. 동방에는 며칠 전 지원서를 낼 때 있었던 부회장 언니랑 오빠들 셋이 있었다. 눈으로 대강 둘러보니 참가자들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익숙한 노래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다른 참가자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의 어색한 모습이 포착되었는지 눈치가 재빠른 한 언니가 키가 크고 약간 마른 오빠를 향해 말했다.

“얘들아, 모해? 은서 씨가 심심해 보이잖아. 아이스 브레이킹 좀 해봐. 이그.. 참.”

곧 오빠들이 수선을 피우며 내 앞으로 모여들었다. 지원서 낼 때 잠깐 얼굴만 봤지 생면부지의 사람들과 어색하지 않으려 하는 행동들이 더 어색함을 자아냈다. 하지만 게임을 하면서 이내 어색함이 풀리고 지루하지 않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새 한 시간 반이 흘렀지만 그 사이 나를 포함해 참가자가 6명 정도밖에 오지 않았다. 참가자 중 2분의 1 정도만 제시간에 도착한 상태였다.


‘약속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라고 생각하던 찰나, 한 오빠가 동방으로 헐레벌떡 뛰쳐 들어왔다.


“지금 도착한 참가자들만이라도 우선 지하 연습실로 내려가 있어야 할 것 같아. 춤 가르쳐주기로 한 사람을 오랫동안 기다리게 해서 화가 많이 나있어.”


동방 선배들을 따라 지하 1층으로 내려가면서 춤을 가르쳐주는 사람이 제발 남자가 아니길 바랬다. 처음 만나게 된 사람들과 인사도 하기 전에 춤을 먼저 배우는 것도 어색한데 일면식 없는 남자 앞에서 춤을 추게 될 것을 생각하니 아찔했다. 춤을 잘 추는 사람들을 오랫동안 동경해왔으나 실상 내가 춤을 춰본 기억이 별로 없었기에 춤을 추는 내 모습은 상상 속에서도 어색했다.

나는 지하 연습실에 도착하자마자 신발을 벗고 실내에 들어가기 앞서 고개만 빼꼼히 내밀고 안을 살폈다. 우리들을 기다리느라 화가 나 있다는 사람이 누구인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했다. 그때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은 남자였다. 결국 "남자"였다.

‘망했다.’


팔짱을 낀 채 뭐가 그리도 화가 나있는지 인상을 쓰고 있는 남자가 내쪽(입구 방향)을 바라보고 있다 내 눈과 마주쳤다. 순간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벽 뒤로 숨어버렸다. 놀란 감정 때문이었을까. 갑자기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두근두근두근...


조금 전 보았던 남자의 모습이 눈앞에 선명하다. 하얀색 맨투맨 티셔츠에 베이지색 통 넓은 바지를 입은 그는 아주 까맣고 빛나는 머리 사이로 까만 눈동자를 반짝이고 있었다. 이 두근거림은 결코 순간의 놀란 감정 때문이 아니었으리라.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이런 거구나.’


순정만화 속 혹은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아들같이 곱상하고 귀티 나는 외모다.

‘와~ 저런 사람이 현실에도 존재하는구나.’


뒤에서 들어오는 다른 참가들에게 등 떠밀려 연습실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면 중 두 면이 전신 거울로 되어 있는 연습실은 크기가 그렇게 크진 않았지만 고등학교 때의 무용실보다 깔끔했다. 참가자 전원이 아직도 다 모이지 않았지만 형편상 지금 모여있는 사람들이라도 춤을 익혀야 했기에 우리는 두 줄로 자리 잡고 섰다.


연습실에서 인상 쓰고 서 있던 그 매력적인 남자가 우리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대회에 참가하게 된 분들을 먼저 만나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우리 학교 댄스 동아리 부회장입니다. 축제 전 시간이 없는 관계로...(이때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했던 나머지 참가자 여섯 명이 동방 선배들한테 안내받으며 우르르 연습실로 들어온다.)... 오늘과 내일 중으로 댄스 안무를 다 익히셔야 합니다. 추가적인 연습은 개인적으로 진행해야 합니다. 안무가 기억나지 않는 경우 안무를 빨리 외우신 분들이 나머지 분들을 가르쳐주세요.”


시간을 지키지 않는 참가자들에게 통성명할 필요도 없다는 듯이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았다.

“이번 대회에서는 엄정화의 'Festival'에 맞추어 춤을 출 거예요.”라며 옆 있는 라디오 카세트의 전원을 켜고 노래를 재생한다.


춤을 배우면서 댄스 동아리 부회장이라는 이 남자의 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말할 때 카리스마 있지만 수줍은 듯 웃으며 이따금씩 말을 더듬는 모습은 좀 전에 내가 생각했던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에 인상을 쓰고 있어서 까칠해 보였는데.. 예상과 다른 모습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춤을 가르치는 동작이나 말투, 가끔 어린아이처럼 해맑게 웃는 미소, 춤을 추면서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에 앞머리가 젖었는데도 찰랑대는 머릿결.. 이 모든 것이 영화 속 주인공이 사랑에 빠졌을 때처럼 슬로 모션으로 환하게 다가왔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감을 느낄 수 있다니. 과히 비현실적인 느낌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근두근 반응하는 심장 소리가 음악 소리보다 더 크게 '쿵.쿵.쿵.' 울려댔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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