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 이야기
동생의 전화
남파랑길 9코스 초입에서 산을 오르고 있을때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부부가 오늘 남파랑길 걷는 줄 알텐데 왠 전화지 하고 받았다.
어제 동생이랑 나랑 47년, 49년 만에 정말 깊은 대화를 나누어서 기분 좋은 밤이었다. 그런데 할머니가 새벽 2시에 잠도 안자고 거실에서 또 혼잣말에 유령을 상대로 욕을 퍼부었다고 했다. 안방에는 엄마가 자고 있고 본인은 잠이 깨서 갑자기 무서웠다고 했다. 어린시절 할머니가 욕을 하며 화를 내고 엄마는 허약한 체질이라 몸 컨디션이 안좋으면 늘 짜증을 내다보니 둘 사이에서 자주 무서웠다고. 그때의 경험이 올라온 모양이었다. 자신도 교회에서 생명나무상담 같은 걸 5년정도 받으면서 치유작업을 했는데도, 어제 정말 기분 좋게 우리집에서 나왔는데 또 갑자기 무섭고 공황까지 올 느낌이라고 했다.
동생에게 설명을 했다. 5년동안 상담을 받았어도 어린시절 네 몸과 마음에 각인된 것이 너무 커서 그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라고 했다. 잔 감정들이 남아서 수시로 그때와 비슷한 감정들이 또 올라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나도 개인상담을 총 3년, 집단상담도 수십번을 받았어도 이제는 나스스로 일상속에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들을 스스로 들여다보고 읽어내고 감정을 표출하는 작업을 수시로 한다고.
그래서, 어제 마루에 나가 할머니에게 화를 냈다고 했다. 보청기를 껴도 잘 못 들으시고 어제는 보청기까지 뺐으니 동생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전혀 몰랐을 거다. 하지만, 동생에게 그렇게 네 안에 것을 밖으로 표출한 건 잘 했다고 말했다. 할머니도 자신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분위기상으로 인식은 하셨을 것이다. 새벽 2시에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동생은 잠도 못자고 뜬 눈으로 지새웠고 아침에 엄마에게도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다고 했다. 그리고 엄마도 자신이 외할머니 문제에 대해서 회피하는 걸 인정은 하더라는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평소 같으면 계속 방에 있었을텐데 엄마도 미안한지 할머니 밥도 차려주고 그랬다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오랫동안 동생은 불면증이 있었다고. 난 또 그런건 몰랐네. 원래는 오늘 부산에 다니는 교회에 다녀오려고 했는데, 기운이 없어서 집에서 누워서 쉬어야겠다고 했다. 할머니와 엄마 사이의 문제는 혼자만 마음에 두지 말고 감정도 종종 뱉어 내고 때론 내게 전화도 하고 그래라 했다. 최근에 다시 개인상담을 몇차례 받고 있다고 한다.
어제 동생이랑 대화를 하면서 요즘 엄마랑 어느정도 잘 지내니 어느날 엄마가 돌아가면 혼자 외로울 거 같다는 이야기를 했다. 교회 커뮤니티도 있겠지만, 기혼자와 비혼자의 생활과 관심사가 너무 달라서 교회안의 커뮤니티만으로는 부족하니 교회 바깥의 관계망도 지금부터 천천히 만들라고 했다. 나도 짝지와 너무 사이좋게 잘 지내지만, 짝지외에도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관계망을 공을 들여 천천히 만들어가고 있다는 조언을 했다. 나이가 들면 경제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취약해 지니 취약한 사람으로서 타인과 도움을 서로 주고 받고 함께 살아야 하니 그런 관계망들이 필요하다는 말까지 보탰다.
어린시절 화를 자주 내는 할머니와 짜증을 내고 혼자만의 휴식으로 회피하던 엄마 사이에서 그리고 오빠는 방에서 무기력하게 누워만 있었으니 혼자서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때 못했던 오빠 노릇을 이제야 조금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생은 어느 정도 답답함이 정리 된 것 같아서 우리는 지금 트래킹 중이니 마저 걷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