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후기
고요한 결심 - 밑줄그은 부분들
너무나 내게 좋은 책이다. 책을 읽으며 이렇게 밑줄을 많이 긋기도 처음이다. 2025년 올해 내게 가장 좋았던 책이다.(오춘실의 사계절도 마찬가지이고) 책 후기는 따로 길게 적을 생각이다. 멋지고, 귀중하고, 필요한, 감사한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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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p - 움직이지 못한다는 건 단지 이동의 자유를 잃는 게 아니다. 삶의 결정권을 잃고, 누군가의 리듬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23p - 노환이라는 감옥에 갇힌 사람을 면회 가서 아무렇지 않게 일상처럼 웃고 말하려면 마음 바닥에서 에너지를 길어올려야 하기 때문이다.
26p- 고통을 이해한다고, 죽음을 선택하는 걸 받아들여야 한단 밀인가?(아마 시어머니랑 하루종일 같이 산다면 시어머니의 선택을 좀더 받아들이지 않을까.)
31~32p - 쿠키를 굽는 일은 그 시기에 내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일 중 하나였다. 버터를 부드럽게 만들고, 손으로 반죽을 치대고, 오븐에 넣고 기다리는 일. 그 시간만큼은 몸에 밴 치료약 냄새를 잊을 수 있었다. 위탁된 시간 속에서, 사소하지만 소중한 무언가를 훔치는 기분이었다.
32p -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어쩌면 매일 조금씩 죽어가는 자신을 지켜보는 일일 것이다.
33p - 지금 우리가 마주한 건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를 묻는 시간이다.
33p - 끝이 가까워지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어쩌면 여전히 살아있다는 그 ’느낌‘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건, 삶이 주는 친밀함과 부드러움, 따뜻함으로 이어진다는 걸 느낄 수 있는 쿠키 한 조각, 그리고 아주 작은 위안뿐이다.
42p - 그녀에게 ’집‘은 단순한 장소가 아니었다. 삶은 아직 자신이 결정한다는 감각이 허락되는 공간이다. 식탁위에 무엇을 놓을지, 커튼을 열지 말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곳. 그 일상의 사소한 결정들이 ’나는 아직 삶의 주인이다‘라는 감각을 지켜준다.
43p - 노모는 ’이젠 내가 중심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가족의 시간을 자기 삶의 일부처럼 다루는, 의존을 가장한 권력이었다. 누군가의 희생을 통째로 끌어다 쓰는 일은 더 이상 미덕으로 부르지 말아야 한다.
p56 - 특히 ‘알아서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야말로 오해와 갈등의 시작이다. 때로는 나조차 나를 모르는데, 마음의 설계도가 전혀 다른 타인이 어떻게 헤아려주겠는가. 그래서 기대에는 통역이 필요하고, 돌봄에는 합의가 있어야 한다.
p58 - 귀가 멀어간다는 건 단지 소리를 잃는 일이 아니라, 침묵속에서 천천히 자신을 잃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p60 - 소통은 말이나 기술이 아니라, 늙음을 이해하고 침묵을 듣는 일이라는 말을 해주려다 그냥 삼켰다.
p61 - 사람들은 늙음이라는 불편한 거울 앞에 오래 머물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 안에 고유한 삶과 이야기가 있다는 사실도 잊는다. 아이처럼 챙겨주지만, 대화하지 않는다. 배려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회피다. 침묵의 방에서 노인을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가장 단순한 방법은, 눈을 맞추고 질문하는 것이다.
p62 - 내가 생각하는 가장 공정하고 완벽한 인생의 룰은 이것이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방식으로 타인을 대우하는 것.’ 상대가 누구든, 어떤 상황이든. 이를테면 부모를 돌보는 일도 마찬가지다. “만약 네 자식이 너를 그렇게 대한다면?” 그 질문이면 충분하다.
79p -돕는다는 건, 돕지 않는 법을 아는 일이기도 하다.
80p - 그녀의 결정은 초월이나 평화를 향한 것이 아니라, 무너지는 자신의 모습을 더는 감당할 수 없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지 모른다. 그 두려움 앞에서 나는 무력하다.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녀의 결연함을 존중하는 일이라는 걸 안다.
99p -그녀를 본다. 걷는건 버겁고, 듣는 건 희미하고, 보는건 어둠이다. 햇살이 내려도 따뜻하지 않고, 밤이 와도 잠은 오지 않는다. 과거를 품고 있는 공간에서 그녀는 현재를 조금씩 잃어간다. 하루는 한 달 같고, 밤은 길고, 새벽은 더 멀다.
p118- 화가 나는 건, 그(올비)의 무해하고 중립적인 태도가 결국 자기중심적으로 살아온 안느(올비의 여동생)라는 존재에 어떤 방식으로든 기여해 왔다는 점이다.
p120 - 사람달은 이유를 찾지만, 삶과 죽음 사이에는 아무런 원칙이 없다.
p143 - “운이 좋았어”라는 말은 사랑한다는 말보다 덜 부담스럽고, 고맙다는 말보다 더 깊고, 미안하다는 말보다 따뜻하다. 어쩌면 이별을 가장 덜 아프게 만드는, 배려의 말 같다.
p145 - 그녀는 자신의 죽음을 ‘행사’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저 일상의 연장선이길 바랐다.
p180 - “엄마, 모든 죽음은 고독사야“ 자기의 죽음은 알 수 없고, 모든 죽음은 결국 타자의 것이다.
p181 - 죽음은 순간이지만, 삶은 과정이다. 슬픈 건 고독한 죽음이 아니다. 어쩌면 외로운 삶이다.
p192 - 인간이 자신에게조차 소외되는 이유는, 멈추고 존재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도 모른다. 어떤 침묵은 텅빈 것이 아니라, 답으로 차 있다. 이겨내는 것보다 느긋해지는 것. 나이가 들면서 소리에 둔해지더라도 고요를 들을 줄 아는 것. 우리는 얼마나 자주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본 적 있던가.
194p -존재를 보내는 건 슬프지만, 관계의 죽음은 훨씬 더 고통스럽다. 준비된 죽음이든 아니든, 결국 사람은 살아온대로 죽는다.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게, 단호한 사람은 단호하게. 죽음의 순간은 우연이지만, 죽어가는 과정은 삶의 그림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