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간의 자연 회복력을 높게 평가하는 사람이라 아프더라도 되도록이면 병원에 가지 않고 해결하려 한다. 그러나 정말로 아플 때는 병원에 가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 횟수로 세어보니 대충 일 년에 서너 번 정도 되는 거 같다. 나에게는 병원 가는 것은 정말 마지막에 고르는 선택지이다. 그만큼 가기 싫은 병원 가는 일이 만약 말이 안 통하는 곳에서 찾아온다면 어떨까? 상상하기도 싫을 정도로 두려웠다. 하지만 이런 만나기 싫은 상황은 언제나 내 예상과는 다르게 빨리 찾아오곤 한다.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대략 2~3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허벅지 쪽에 작은 상처가 났었다. 관절 부분도 아니고 별로 아프지도 않아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낫는 그런 상처라고 생각했지만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나중에는 그 상처가 곪더니 빨갛게 부어오르며 약간 쓰라리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도 컨디션이 그냥 좀 안 좋아서 그런가 생각하면서 넘겼었는데 어느 날 저녁에 자다가 모르고 그 상처 부위를 건드리게 되었는데 엄청난 통증과 함께 잠을 깨고 말았다.
그제야 나는 이대로 두면 큰일 나겠다고 생각이 들어서 병원을 가야겠다 결심했다. 되도록이면 병원은 가기 싫었는데 말도 안 통할 거 같아서 걱정되기도 했었다. 그렇게 고민하다가 문득 학교 입학할 적에 들어놓은 의료보험을 활용해 보기로 생각했다. 입학 당시에 의료보험 증서와 카드를 수령하고 그냥 눈으로만 훑어보고 책장 어딘가에 짱박아 두었는데 뒤늦게라도 보험증을 읽어보았다.
의료보험증 : 자세한 보장내용과 보장 액수가 적혀있다
의료보험 카드 : 나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있다
읽어보니 보험 번호 나의 인적사항과 그리고 보장내용 보험적용이 가능한 병원 등이 적혀있었다. 사실 뭐가 뭔지 몰라서 같은 방 친구에게 물어보고 사전을 찾아가면서 겨우 알게 된 사실이었다.
자! 이제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았는데 두 번째 난관이 남아있었다. 어떻게 갈 것인가?
인터넷으로 병원을 검색해보니 예약을 해야 된다고 한다. 러시아어로 직접 전화해서 예약해야 하나?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쓰는 SNS 서비스인 VK의 채팅으로도 예약이나 질문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미리 문자를 보내니....
병원 예약 채팅 내용
오후 네시에 진료를 마치기 때문에 그전에 아무 때나 와도 된다는 문자를 받았다. 예약은 따로 안 해도 되었나 보다. 수업 마치는 시간 계산하면 충분했다. 학교에서 병원까지 지하철로 대략 40분 정도였다.
긴장했지만 예상보다 순조롭게 끝난 병원 진료
병원에 들어가서 바로 안내 데스크로 향했다. 솔직히 가장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한국에서도 병원에 가면 긴장되는데 말이 잘 안 통할걸 생각하니 막막했다.
머릿속에 어떻게 대화할 것인지 시뮬레이션은 이미 마쳤었다. 못 알아들으면 못 알아듣는 데로 어떻게 되지 않을까? 우선 보험증과 카드를 다짜고짜 내밀었다. 그러니 간호사는 보험증을 보고 컴퓨터를 두드렸다.
간호사가 첫마디를 꺼냈는데 다행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처음 방문하는 거냐고 되물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디가 아파서 왔냐고 물어보길래 미리 사전에서 찾아본 단어로 이야기했다. 상처, 감염, 종기, 피부과 등 당시 나에게는 아주 어려운 단어들이었다.
혹시 내 발음이 안 좋아서 못 알아들으면 미리 휴대폰에 적어둔 단어들을 보여줄 각오로 준비해두었지만 다행히 간호사가 알아들었나 보다. 그 이후 진료실로 안내를 받았다.
진료실에서 상처를 본 의사 선생님이 언제부터 그랬냐 통증이 있는가 그런 질문을 하였다. 상처부위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고 진료가 끝났는데 병원 입장에서부터 진료 완료까지 채 10분도 안 걸렸던 거 같다.
필요 이상으로 긴장한 거 같아서 민망함을 뒤로하고 병원을 나왔다.
내부 사진은 따로 못 남겼는데 병원 내부도 깔끔하고 진료실 및 장비도 꽤나 좋아 보였다. 홈페이에서 가져온 사진인데 거의 이 정도로 깔끔하다.
사람은 위기에 강해진다
처방전과 진단서 같은걸 받고 몇 가지 주의사항을 듣고 돌아왔다. 진단서는 나가기 전에 접수처에 주었는데 보험 처리 완료되었다고 그냥 가면 된단다. 처방전을 가지고 바로 앞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타서 돌아왔다. 바르는 연고 1개, 그리고 상처에 붙일 반창고였다.
이후 한 사흘 정도 약을 꾸준히 바르니 상처는 금방 나았다. 병원 가기 전만 해도 큰일 난 거 아닌지 호들갑 떨었는데 그게 무색해질 정도로 정말로 쉽게 나았다.
아무튼 별일 아니라 다행이었다. 아무래도 한국에서처럼 소통이 자유자재로 되는 것도 아니라 많이 긴장했는데 무사히 넘기고 왔다. 별거 아닌 건데도 뭔가 해냈다는 뿌듯함이 느껴졌다. 왜 유학을 하면 언어를 빨리 배우는 지도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모르면 삶에 큰 지장이 생기니까. 다행히 유학생활 이후에 병원 신세를 진적은 없었다. 농담이지만 아마 두세 번 더 병원에 갔으면 더 빨리 러시아어 실력이 늘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