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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 지하철속 소비에트 연방

지하 100m 아래, 소련의 야망이 담긴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by 타이준


⚠️ 주의사항

이 여행기는 코로나 팬데믹 이전, 그리고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현재 러시아의 여행 환경은 당시와 다를 수 있으며,

정치적·국제 정세로 인해 방문이 제한되거나 위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본 글의 내용은 단순한 여행 경험 공유일 뿐, 실제 여행 계획 시 참고하지 않는 것을 권장합니다.


러시아 여행을 떠났던 이유


남들이 쉽게 하지 않는 것을 경험해 보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어를 배워보자는 생각도 그런 맥락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조금 불순한 동기이기도 했습니다.


한국에는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고, 영어를 쓰면 문법이 틀렸느니 뭐니 하는 지적을 듣는 일이 많습니다. 저는 이런 지적 받는걸 정말 싫어합니다.


하지만 러시아어는 어떨까요?


조금 틀려도 알아듣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러시아어를 배우면서 러시아에서 공부할 기회도 생겼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구소련 국가 출신 친구들도 만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들과 어느 정도 소통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습니다.


다만, 몇 년 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러시아에 대한 국제적인 인식이 많이 바뀐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경험했던 러시아의 도시들과 문화, 그리고 사람들은 자체로 충분히 흥미롭고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 기억을 다시 여기서 풀어보려고 합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 지하 깊숙이 남겨진 소련의 흔적


러시아를 여행하면 가장 먼저 경험하게 되는 것 중 하나가 지하철입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순간부터 러시아의 지하철을 이용하게 되지만, 특히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은 다른 도시들과는 조금 다릅니다.


소련의 전성기 시절, 지하철조차 체제 선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소련 정부는 단순한 교통수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부강함을 상징하는 공간을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역들은 궁전처럼 웅장한 디자인과 장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 중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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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은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철 중 하나로 꼽힙니다.


이 도시는 원래 습지가 많아 지반이 약한 곳이기 때문에, 안전한 지하철을 건설하려면 더욱 깊이 파야만 했습니다.


그 덕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을 타려면, 먼저 매우 긴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야 합니다.


숙소 근처에 있던 가스찌니 드보르(Гостиный двор) 역에서 지하철을 탑승했을 때, 이 긴 에스컬레이터의 존재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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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금방 도착하겠지 싶었지만, 몇 분이 지나도록 내려가는 끝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러시아 지하철이 얼마나 깊은 곳에 위치하는지 실감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렇게 깊은 곳에 건설된 이유는 단순한 지반 문제 때문만은 아닙니다.


소련 시절, 지하철은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방공호 역할도 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러시아 지하철역들은 유사시에 대피소로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곳이 많습니다.


궁전 같은 플랫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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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플랫폼에 도착하자,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러시아의 다른 도시들처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 역시 단순한 승강장이 아니라 하나의 기념비적인 공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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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기둥과 모자이크 벽화, 웅장한 샹들리에.


일반적인 지하철역이라기보다는 궁전의 홀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각 역마다 다른 디자인이 적용되어 있는데, 소련의 역사와 문화를 담은 조각상과 그림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출퇴근길을 걷는 러시아인들에게는 익숙한 공간이겠지만, 여행자로서는 그 자체로 하나의 관광지 같은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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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르게 움직이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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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지하철에서 또 한 가지 인상적이었던 점은 사람들의 빠른 움직임이었습니다. 지하철이 도착하면 승객들은 빠르 게 승하차하며, 문이 열리는 순간부터 닫힐 때까지의 시간이 길지 않기 때문에 모두 서두르는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너무 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지하철을 놓쳤다고 실망할 필요도 없습니다. 배차 간격이 한국보다 훨씬 짧기 때문입니다.


특히 출퇴근 시간대에는 1분 간격으로 열차가 도착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입니다. 혹시 열차를 잘못 탔다고 해도 당황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의 대부분 역은 섬식 승강장 구조이기 때문에, 반대편 방면으로 이동하고 싶다면 내려서 바로 맞은편 승강장에서 다시 탑승하면 됩니다.


이러한 구조 덕분에 초행길이라도 비교적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 또 다른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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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소련의 야망과 역사, 그리고 러시아인들의 일상이 함께 살아 숨 쉬는 공간이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면서, 이 도시는 지상의 궁전뿐만 아니라, 지하에도 또 다른 세계를 품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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