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모스크바 붉은광장 : 눈과 총성과 성당의 도시

피로 물든 광장, 성스러움과 공포가 공존하는 곳

by 타이준

⚠️ 이 여행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전에 다녀오고 작성된 글입니다.

여행 당시의 분위기, 입국 조건, 현지의 정치 상황은 현재와 많이 다를 수 있습니다.


모스크바는 낯선 듯 익숙한 도시입니다. 냉전의 이면, 문학과 전쟁, 겨울의 그림자와 눈부신 황금빛 첨탑들이 뒤섞인 풍경.


그 풍경의 중심에, 붉은광장이 있습니다.


IMG_20180206_103041.jpg?type=w1

눈 쌓인 거리 끝. 저는 ‘부활의 문’을 통과해 붉은광장에 들어갔습니다. 역설처럼 들리는 이름. 혁명의 광장, 피로 얼룩진 역사 속의 공간에 부활이라니.


부활의 문 들어가기 전 우측에 보이는 주코프 장군의 동상이 눈에 들어옵니다.

IMG_20180206_094802.jpg?type=w1
IMG_20180206_094933.jpg?type=w1

소련군의 전설. 스탈린의 명령 뒤에서 실질적으로 전쟁을 지휘했던 이 남자.


그는 패배보다 고립을 두려워했고, 실리보다 신념을 중시했던 듯 보입니다. 말 위에 있는 주코프의 동상은 지금도 광장을 내려다보며, 전쟁의 잔해 위로 쌓인 나라를 지켜보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는 늘 그렇게, 이질적인 것들을 당연하게 공존시키며 살아갑니다.

IMG_20180206_103250.jpg?type=w1

입구로 들어가자 나온 광장 왼편에는 카잔 성당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핀란드 전쟁의 승리를 기념해 세운 성당. 전쟁을 잊지 않기 위해 만든 예배당. 종교조차 전쟁을 기억하는 방식. 러시아는 그런 나라입니다.

IMG_20180206_103950.jpg?type=w1

눈 내리는 아침, 아이스링크가 된 붉은광장의 풍경 속에 성당은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레닌의 묘 — 잊힌 유언, 지워지지 않는 상징


광장 한켠에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묘가 있습니다.

그곳에 들어서기 전, 가벼운 수색을 받고야 안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시신은 방부 처리된 채 영구 보존되어 있고, 내부는 촬영 금지. 빛도 거의 없고, 공기도 정지된 듯한 공간입니다.

IMG_20180206_110624.jpg?type=w1

죽음의 공간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이곳에서 수많은 사람들과 계속 ‘만나고’ 있습니다.


그가 남긴 유언은 간단했습니다.

“시신을 화장해 레닌그라드의 어머니 묘 옆에 묻어달라.”


하지만 스탈린은 그를 신격화했고, 유언은 무시당했습니다.

지금도 레닌의 묘를 두고 보존이냐 철거냐를 두고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고 합니다.

역사가 늘 정답을 갖고 있지 않듯, 그를 바라보는 시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바실리 성당 — 이반의 꿈, 건축가의 비극

IMG_20180206_103844.jpg?type=w1

붉은광장의 끝,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역시 성 바실리 성당입니다. 화려한 양파 돔. 게임 ‘테트리스’로 처음 이 성당을 본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이곳은 단지 예쁜 성당이 아닙니다. 피의 이반이 카잔 칸국을 무너뜨린 기념으로 세운, 영광의 상징이자 광기의 유산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는 이 아름다운 건축을 완공한 뒤, 다시는 이보다 더 아름다운 성당을 짓지 못하게 하려고 건축가의 눈을 뽑았다고 합니다.


사실이든 아니든, 이곳은 예술이 권력과 어떻게 얽혔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성당 내부는 박물관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IMG_20180206_112726.jpg?type=w1
IMG_20180206_111633.jpg?type=w1
IMG_20180206_112029.jpg?type=w1
IMG_20180206_113405.jpg?type=w1

당시 수도사들이 사용했던 유물들, 채찍과 족쇄, 금으로 장식된 성화와 찬송서.

IMG_20180206_113357.jpg?type=w1

탑 안쪽에는 촘촘히 그려진 예수의 초상들과 이콘화가 가득했습니다. 탑 안에서 올려다본 돔의 곡선, 그 아래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기운. 사람들이 성스러움에 고개를 숙인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눈 쌓인 광장, 역사 위를 걷다

IMG_20180206_103950.jpg?type=w1

붉은광장은 아침에도, 저녁에도도 매혹적인 공간이었습니다. 혁명의 심장, 제국의 중심, 전쟁의 무대, 관광지의 풍경. 시간은 흘렀지만, 이 광장은 여전히 그 모든 것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 위를 걷는다는 건, 단지 모스크바에 왔다는 의미를 넘어 이 나라의 지난 백 년을 천천히 밟고 지나간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충남 홍성 — 청산리의 영웅, 김좌진 장군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