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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인데 아무도 웃지 않는가? : 트레챠코프 미술관

러시아는 왜 예술로 고통을 증명하려 했나

by 타이준

러시아의 겨울은 사색에 어울립니다. 온 도시가 흰 눈에 잠긴 풍경 속, 저는 조용히 러시아의 심장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그날 제가 찾은 곳은 바로 트레챠코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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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상징 중 하나이자,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시 박물관과 함께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미술관입니다.


하지만 이 둘의 색깔은 완전히 다릅니다. 에르미타주가 유럽 명화의 정수라면, 트레챠코프는 철저히 러시아의 역사, 민중, 영혼을 그린 미술관입니다.


이곳은 백만장자 상인이자 예술 후원가였던 파벨 트레챠코프가 평생 수집한 작품들을 모스크바에 기증하면서 시작된, ‘국민의 미술관’입니다.



겨울의 눈을 뒤집어쓴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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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 도착하니, 트레챠코프의 동상이 하얗게 눈을 뒤집어쓴 채 서 있었습니다. 마치 자신의 작품들을 자랑스레 지켜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건물 자체도 고풍스러운 러시아 전통 양식으로 지어져, 박물관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대감을 품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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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가면, 먼저 창립자 트레챠코프의 흉상과 그의 유품, 그리고 미술관의 설립 배경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예술은 민중의 것이다.” 트레챠코프가 남긴 이 말은 미술관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처럼 느껴졌습니다.


러시아의 얼굴, 러시아의 붓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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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장은 러시아 작가들이 그린 러시아의 인물과 풍경, 시대의 초상들로 가득했습니다. 서유럽 회화와는 확연히 다른 감정의 질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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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질 하나에도 이 나라의 추위, 슬픔, 강인함이 배어 있었고, 인물들의 눈빛에서는 시대의 서사와 인간의 고통이 비쳐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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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마다 해설사들이 서서 관람객에게 작품의 뒷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이들은 바닥에 둘러앉고, 어른들도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귀를 기울입니다.

단순한 설명이 아닌, ‘이야기를 듣는’ 시간. 미술조차 이야기로 전하는 러시아의 방식이 참 인상 깊었습니다.



부조리가 사랑인 시대

바실리 푸키레프 – 『어울리지 않는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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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 중 하나는 바실리 푸키레프의 『어울리지 않는 결혼』이었습니다. 1862년에 발표된 이 작품은, 귀족 노인과 어린 신부가 서 있는 결혼식 장면을 그리고 있습니다.


예순이 넘어보이는 노인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하며 신부를 곁눈질 하고 있고, 스무살도 채 안되보이는 젊은 신부는 누가봐도 어두운 표정을 하고 있습니다. 하객들의 표정은 싸늘하고 성직자의 얼굴엔 침묵이 내려앉았습니다. 이건 결혼이 아니라, 강요된 계약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부조리, 여성의 억압, 타락한 귀족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한 작품입니다. 혁명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게 아닌거 같습니다. 이런 불균형이 하나둘씩 쌓이며, 시대는 조용히 무너진것입니다.


진리는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니콜라이 게 – 『진리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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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눈을 사로잡은 건 니콜라이 게의 『진리란 무엇인가』. 성경 속 본디오 빌라도가 예수에게 진리를 묻는 장면을 재해석한 작품입니다.


예수는 침묵으로 응답하고, 빌라도는 혼란과 두려움이 뒤섞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봅니다. 권력과 진실이 마주한 찰나의 긴장. 그림은 말을 하지 않지만, 그 정적 속에서 진리가 울리고 있었습니다.


러시아의 광기 일리아 레핀 – 『1581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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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일리아 레핀의 『1581년 11월 16일』. 러시아 황제 이반 4세가 분노를 이기지 못해 자신의 황태자 아들을 지팡이로 때려 죽였다는 사건을 상상해 그린 작품입니다.


붉은 피에 젖은 아들을 품에 안고, 이반은 공포와 후회로 눈을 부릅뜨고 있습니다. 황제의 손에 죽은 아들. 그림은 권력의 광기, 그리고 씻을 수 없는 죄의식이 만들어낸 비극의 한 순간을 깊이 있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 장면 앞에서 저는 문득,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조선의 영조를 떠올렸습니다.


권력과 광기, 사랑과 공포, 부성과 죄의식—어쩌면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반복되는 인간의 참극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고통을 품은 눈빛, 용서를 선택한 인간 – 안톤 체호프

그림을 따라 걷다 보면, 문학 애호가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는 초상화도 하나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안톤 체호프의 초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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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문학의 거장이라 하면 흔히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를 떠올리지만 솔직히 말해 저는 이 두 사람의 위대함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의 복잡한 사생활에 마음 한편이 걸립니다. 반면, 체호프는 제 기준에서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며 극심한 가난과 학대를 겪었지만, 그는 그 아버지를 용서했고, 자수성가하여 의사가 되었으며, 동시에 세계 문학사에 길이 남을 단편들을 남긴 작가가 되었습니다.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그 글이 결국 수많은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게 되었죠.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오래 살지 못했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앓던 결핵은 끝내 그의 생명을 앗아갔고, 세상은 너무 일찍 그를 떠나보냈습니다.


모른다고 못 느끼는 건 아니다

이 외에도 수많은 작품들이 러시아의 역사, 전쟁, 종교, 민중의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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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술의 신 바쿠스를 재해석한 흥미로운 조각, 혁명 전후의 혼란과 열망을 담은 회화들까지.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는 하지만, 저는 모르더라도 느껴지는 감동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실감했습니다.


설명 없이도 전해지는 슬픔, 기쁨, 고통, 희망. 예술은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통과합니다.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단순한 전시 공간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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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러시아의 상처와 기억, 고통과 자부심이 뒤섞인 생생한 장소입니다. 제국의 허상, 민중의 고통, 예술가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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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것들이 조용히, 그러나 강렬하게 말하고 있었습니다.


러시아를 이해하고 싶다면, 이곳에서부터 시작하셔도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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