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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 승리 박물관 : 승리했으나, 인간은 패배했다

2천만 명의 피 위에 세운 승리 – 러시아 전쟁기념관의 역설

by 타이준

러시아 모스크바에 위치한 승리박물관 (Музей Победы) 은 단순히 전쟁의 승리를 자축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안에는 수천만 명의 죽음과 희생, 그리고 인간이 인간에게 가한 잔혹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습니다. 그 공간을 천천히 걸으며 저는 과거를 보았고, 현재를 떠올렸으며,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대조국전쟁”이라는 이름의 무게


우리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러시아인들에게는 대조국전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는 단순한 명칭의 차이가 아니라, 이 전쟁을 대하는 그들의 감정과 인식을 반영합니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소련 사이에서 벌어진 동부전선 전투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하고 참혹한 전쟁이었습니다. 무려 2천만 명 이상의 사상자, 전 소련 인구의 10%가 넘는 피해. 학살, 약탈, 강제노역… 독일군이 지나간 자리마다 고통이 쌓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련은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고, 마침내 베를린까지 진격하며 전쟁의 승리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사람들은 지금도 이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쟁을 기억하는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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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승리공원(Парк Победы) 역에서 내려 약 10분을 걸으면, 거대한 기념탑과 함께 대조국전쟁 기념관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창으로 뱀을 꿰뚫는 조각상이 인상적인 승리탑, 꺼지지 않는 불꽃, 그리고 격전지를 나열한 석비는 러시아가 이 전쟁을 얼마나 깊게 각인하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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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면 선전 포스터, 전쟁 지도, 무기, 장비 등 수많은 전시물이 관람객을 맞이합니다. 그 중 지하에 위치한 어머니 조각상은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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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의 동상 위로는, 유리 조형물이 빛을 반사하며 마치 눈물처럼 흘러내리는 듯 보였습니다. 전쟁으로 자식을 잃은 수많은 가족의 눈물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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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군의 무기뿐만 아니라 독일군, 그리고 미국과 영국 등 동맹국의 장비도 함께 전시되어 있어 당시의 국제적 전황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승리 이후, 또 다른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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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 박물관은 저에게 승리만을 찬양하는 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차분하게 전시관을 둘러보다 보면, 이 승리 이후 소련이 또 다른 강압의 체제가 되었다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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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통해 강대국이 된 소련은, 이후 동유럽을 지배하며 제국의 또 다른 얼굴을 만들어냅니다. 한국인에게도 소련은 결코 ‘동맹국’이 아니었습니다. 해방 후 북위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군, 그리고 그것이 결국 한국전쟁과 분단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아픈 역사입니다.


승자는 늘 정의로운가? 그 질문 앞에서 우리는 고개를 숙이게 됩니다.


나치의 또 다른 범죄, 홀로코스트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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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념관의 가장 위층에는 뜻밖의 공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홀로코스트 특별 전시관이었습니다. 나치에 의해 학살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의 흔적을 재현한 이 전시는, 대조국전쟁의 맥락 속에서 ‘희생자’라는 공통된 주제를 깊이 있게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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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조망으로 둘러싸인 수용소 모형, 유대인 아이들의 신발, 강제수용소에서 몰살당한 가족들의 사진… 어떤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인간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역사의 반복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수많은 희생자들 앞에서, 언어는 무력했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가 결코 안전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실감했습니다.


현재의 전쟁을 마주하며

이곳을 방문하고 나서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러시아는 더 이상 피해자가 아닌, 누군가에게는 ‘가해자’로 비쳐지고 있습니다. 대조국전쟁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들의 역사 인식은, 때로는 지금의 전쟁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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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늘 현재형입니다. 그리고 평화는 그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켜내야 할 가치라는 사실을 이곳에서 더욱 절실히 느꼈습니다.


전쟁을 마주할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


기념관을 나서며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과거를 기억하는 일은 결코 과거를 미화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요. 우리는 기억을 통해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게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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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숫자로 기록되지만, 그 안에는 삶이 있었습니다. 이름이 있고, 가족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 모든 이들의 죽음을 '한 번의 전쟁'으로 치부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계속해서 생각하고, 느끼고,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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