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고성 청간정 : 조선의 시인도 반하고 대통령도 찾은 곳

관동팔경의 으뜸이라더니… 그곳에 대통령의 시가 걸려 있더군요

by 타이준

겨울 바람 부는 누각, 한 줄의 시 – 겨울 청간정

겨울 바다는 언제나 묘한 감정을 건드립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고, 잿빛 하늘 아래 검푸른 바다가 수평선을 그릴 때면,

무언가 말을 걸어오는 듯한 느낌마저 들죠.


강원도 고성, 동해안의 높은 언덕에 자리한 청간정(淸澗亭) 역시 그랬습니다.

관동팔경 중 하나로 이름난 이 정자는, 겨울에야 비로소 그 고유의 정적이 완성되는 듯했습니다.


짧은 오르막길, 바람을 맞으며


청간정으로 향하는 길은 길지 않습니다.

20250315_170110.jpg?type=w1
20250315_170120.jpg?type=w1
20250315_170041.jpg?type=w1

전시관을 먼저 들렀다가, 청간정으로 가는 길로 천천히 걸었습니다.


그 짧은 길에도 나무는 고요했고, 바람은 강하게 불고 있었고, 길의 끝에서 마침내 벼랑 위의 누각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20250315_170359.jpg?type=w1

겨울의 청간정은 정말 조용했습니다.

추위가 모든걸 삼키는 계절이라 그랬을까요.

그 누각 앞에 서는 순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숨을 고르게 되더군요.


“설악과 동해가 상조하는 고루에 오르니…”

정자 안에 들어서니, 세 개의 현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20250315_170610.jpg?type=w1

하나는 1928년, 독립운동가 전형윤이 다시 쓴 '청간정(淸澗亭)' 현판.

20250315_170522.jpg?type=w1

또 하나는 안쪽에 걸린,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친필 현판입니다.

20250315_170503.jpg?type=w1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제10대 대통령 최규하가 1980년대 복원 당시 남긴 시문이었죠.


嶽海相調古樓上

果是關東秀逸景

설악과 동해가 상조하는 고루에 오르니,

과연 이곳이 관동의 빼어난 승경이로다.


짧은 두 줄의 시문이지만, 겨울 정자에 서서 바람을 맞으며 이 글귀를 마주하니

마치 이 계절의 풍경을 대신 읊어주는 듯했습니다.

그 현판들을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형윤은 일제강점기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을 세운 첫 번째 대통령,

그리고 최규하는 1980년대 격동의 정치적 전환기를 통과한 인물이죠.


청간정이라는 누각 안에 이 셋의 흔적이 나란히 걸려 있는 모습을 보며,

마치 근대사의 서막과 해방, 그리고 그 이후의 혼란과 과도기적 현실

이 조용한 공간 안에서 묵묵히 함께 숨 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러 올랐던 이 여행길, 그러나 정작 제게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그 안에 숨어 있던 역사의 잔향이었습니다.


그날, 정자에서 본 겨울 바다와 설악산

청간정에서 내려다보는 동해는 파도가 유난히 짙고 낮았습니다.

그리고 돌아나오는 길, 멀리 설악산맥이 보였죠.

20250315_172135.jpg?type=w1

그 험준한 능선 위에 얹힌 은, 마치 그림처럼 하늘 끝에 걸려 있었습니다.

청간정은 봄에도, 여름에도, 가을에도 분명 아름다울 겁니다.


하지만 겨울의 청간정은 오직 '고요'로 완성되는 곳입니다.

바람과 바다, 그리고 누각.




keyword
작가의 이전글서울 스프링페스타 원더쇼 후기: 케이팝 잘 몰라도 감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