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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통치한 여인이 태어난 곳 : 서산 정순왕후 생가

정조의 뒤를 이은 그림자 권력…그 시작은 충남 서산이었다

by 타이준

충남 서산의 한다리 마을은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 속에 자리한 작은 동네입니다. 작고 한적한 마을이지만 역사의 획을 그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습니다.


조선의 태종이 세종대왕(충령대군)을 데리고 머물렀다는 전설이 남아 있는가 하면, 조선 여성 가운데 가장 강력한 정치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 정순왕후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저는 평소 조선 후기의 역사를 흥미롭게 읽는 편입니다. 영조와 정조, 사도세자의 비극과 개혁군주 정조의 행보, 그리고 그 이후 이어진 세도정치의 몰락까지. 마냥 유쾌한 이야기들은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정순왕후는 15세의 나이로 66세 영조의 계비가 되었고, 훗날 증손자인 순조가 즉위하자 3년간 수렴청정을 맡아 국정을 주도한 여인입니다. 한때는 정조의 개혁을 무너뜨린 벽파의 수장으로 기억되었지만, 최근에는 조선을 무너뜨리기보다는 끝까지 붙들었던 ‘정치의 중심축’으로 재평가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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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의 시간을 지켜온 나무 아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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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 앞에 다다르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집 앞을 굳건히 지키고 있는 커다란 나무였습니다. 안내판을 읽어보니, 이 나무는 정순왕후가 살던 시절부터 이 자리를 지켜온 것으로, 무려 400년이 넘은 나무라고 합니다. 그 긴 세월을 묵묵히 버텨낸 나무의 풍채는, 마치 정순왕후의 삶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담장을 따라 마당 안을 들여다보니, 봄꽃이 한가득 피어 있었습니다. 햇살이 그 꽃 위로 조용히 내려앉고 있었고, 그 순간만큼은 시간도 살짝 멈춘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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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집, 그리고 정갈한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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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는 실제로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이기에, 조심스럽게 들어가 마당을 둘러보았습니다. 집안 어르신으로 보이는 할머님이 계셨고, 저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린 후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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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은 전통적인 ‘ㅁ자 구조’의 한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마당을 감싸고 있었고, 그 사이를 걸으며 마루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르니, 18세기 조선의 시간 속으로 잠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안내문이나 화려한 전시물은 없었지만, 오히려 그 담백함이 집의 무게감을 더해주었습니다. 이곳에서 태어난 여인이 훗날 조선을 통치했다는 사실이, 말없이 전해졌습니다.


여인에서 강인한 권력자로, 정순왕후의 흔적

정순왕후를 떠올리면 ‘조선을 망친 인물’이라는 평가가 먼저 따라붙기도 합니다. 정조 사후 남인 계열을 몰아내고, 결국 세도정치의 시작을 열었다는 인식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실록과 최근 연구들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훨씬 복합적입니다.


정순왕후는 정조가 세운 개혁의 일부를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공노비 혁파, 민생 정책, 그리고 장용영 폐지 등은 모두 정조의 뜻과 맞닿아 있었지요. 또한 신유박해 당시에도 정약용 등 일부 인물의 처형을 막았고, 김조순을 등용한 것도 정조의 의지를 존중한 결정이었습니다.


물론, 정치의 세계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남인과 시파 계열의 몰락은 분명히 정순왕후의 책임 아래 있기도 했지만, 이후 세도정치의 전면화는 순조의 무능과 외척 세력의 부상에 더 큰 책임이 있다는 평가가 지배적입니다.


지금도 여운이 남아 있는 공간

정순왕후 생가는 대단히 크거나, 화려한 관광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적인 무게와 조용한 분위기가 오히려 더 깊은 인상을 남깁니다. 실제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집이라는 점에서 더 조심스럽게 둘러봐야 하지만, 그 속에서 만난 고요함은 여느 박물관에서 느낄 수 없는 울림이 있었습니다.


정순왕후는 단지 ‘정조의 정적’이나 ‘세도정치의 원흉’이 아니라, 위기의 조선에서 균형을 잡으려 했던 또 하나의 중심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역사는 늘 한 방향으로만 해석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작은 시골 마을의 생가가 우리가 그동안 놓치고 있던 질문을 던져주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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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오는 길에 있는 마당을 가득 메운 봄꽃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화사하기보다는 조용하고 담백한 빛깔이었고, 그 속에서 작은 생명들이 피어나는 모습이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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