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고, 문장은 남는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처음 접했을때가 생각납니다.
처음엔 그저 ‘읽어야 할 고전’이라는 마음으로 책장을 폈습니다.
하지만 몇 장을 넘기기도 전에, 저는 그 문장 속에 담긴 세계에 빨려들었습니다.
서희의 침묵, 최참판댁의 몰락,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숨결까지.
이야기는 거창했지만, 문장은 단정했고 단단했습니다.
그 문장들은 누군가의 삶을, 시대의 부조리를,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끌어안고 있었습니다.
소설 『토지』 는 하나의 풍경처럼, 한 사람의 생애처럼 보입니다. 그 작가의 발자취를 찾아가본다면 어떨까요?
‘박경리 문학공원’이 있는 곳은 강원도 원주시 단구동.
도심과 그리 멀지 않은, 비교적 평범한 주택지구입니다.
아파트와 상가, 작은 주택들이 드문드문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다 보면 뜻밖에도 아주 조용하고 단정한 문학공간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단구동은 2000년대 들어 주거지로 개발된 곳이지만, 그 안에는 박경리 선생이 직접 살며 『토지』의 4부와 5부를 써 내려간 집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집과 정원을 중심으로, 이곳은 이제 ‘박경리 문학공원’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공원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곳이 ‘박경리문학의집’입니다.
박경리 선생의 생애와 문학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 놓은 공간.
전시는 그 어떤 수식도 없이 절제된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 점이 오히려 작가의 성정과 너무도 닮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전시는『토지』의 주요 구절들이 책 위에 인쇄되어 전시된 코너였습니다.
줄을 따라 이어지는 문장 하나하나를 읽다 보면 그 장면이 눈앞에서 살아 움직이는 듯했고, 문학이 단지 읽히는 것이 아니라 ‘체험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문학의집을 나서면 곧바로 박경리 선생의 옛집으로 이어지는 길이 나옵니다.
1980년부터 선생이 실제로 살며 집필 활동을 이어갔던 집.
겉보기엔 특별할 것 없는 단층 주택이지만 그 안엔 시간과 문장이 겹겹이 쌓여 있었습니다.
집 바깥을 따라 천천히 걸으며 담 너머를 바라보는 동안,
어쩌면 작가란 이렇게, 작은 세계를 끝없이 순례하며 이야기를 짓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학공원 안에는 소설 『토지』의 공간들을 상징적으로 조성한
‘평사리 마당’, ‘홍이 동산’, ‘용두레벌’이라는 세 개의 테마 정원이 있습니다.
각 공간에는 별다른 설명 없이 그저 조용히 앉을 수 있는 벤치와
자연 그대로의 바람, 들꽃, 그리고 나무만이 있었습니다.
그 단순함이 오히려 소설 속 공간을 더 진하게 떠올리게 했습니다.
『토지』를 읽고 그 풍경을 상상해본 사람이라면 아마 이곳에서 문장보다 더 뚜렷한 어떤 장면들을 마음속에 그리게 될 겁니다.
단구동 한복판, 주택지구의 평범한 골목 끝에 자리한 이 작은 문학공원은 생각보다 더 조용했고, 더 깊었습니다.
문학은 책 안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누군가의 삶 속에 뿌리내리고, 시간을 따라, 공간을 따라, 다른 누군가의 마음으로 옮겨 갑니다.
『토지』라는 이야기가 제게 그러했듯, 박경리 문학공원의 풍경 또한 누군가에게 또 하나의 시작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