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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5.18 자유공원 : 광주의 5월은 끝나지 않았다

그날을 설명해주신 어르신의 한마디, 아직도 잊지 못합니다

by 타이준

얼마전 2025년 5월18일 5.18 민주화운동이 45주년을 맞았습니다. 교과서나 뉴스, 기록 영상으로 익히 알고 있던 사건이지만, 저는 직접 그 공간을 걸어보고 싶었습니다.


단순한 공부나 추모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누리고 있는 민주주의가 어떤 자리 위에 놓여 있는지를 피부로 느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제가 도착한 곳은 광주광역시 서구 치평동에 자리한 5·18 자유공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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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과거 보병학교 상무대가 있던 자리입니다. 1980년 5월, 시민들이 계엄군에 붙잡혀와 고문을 당하고, 불법적인 군사재판을 받았던 장소이기도 하지요.


1996년 상무대가 이전되고 나서, 원래의 자리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 당시의 법정과 영창을 복원해 지금의 자유공원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잘 정돈된 신도시 중심에 이렇게 조용하고 무거운 공간이 남아 있다는 사실부터가 조금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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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입구, 그러나 무거운 첫걸음

공원 입구는 특별히 눈에 띄는 장식도, 소리도 없이 차분했습니다. 안내 표지판 하나를 따라 걷다 보니, 잔디밭과 기념 조형물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고,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5·18 역사관 건물이 나타났습니다.


그곳에서 처음 마주한 인상이 잊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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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전시물을 둘러보던 도중, 한 어르신이 제게 다가오셨습니다. "혹시 설명 들어보시겠습니까?"라고 조심스레 물으시더니, 이내 제 옆을 걸으며 차근차근 설명을 이어가셨습니다. 알고 보니 공원에 자주 방문하시며, 젊은 사람들에게 그날의 진실을 조금이라도 더 전하고 싶어 하신다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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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은 마치 그 현장을 직접 목격한 듯 생생한 어조로, 전시관에 걸린 신문 기사, 계엄군 투입 당시의 사진, 시민군이 광주 도심에서 저항했던 구조까지 하나하나 짚어가며 알려주셨습니다.


“이 사진 보세요. 저게 옛 도청이고, 저게 마지막까지 버티던 시민들입니다. 저기 빌딩에 총 자국은 지금도 가서 직접 볼 수 있어요”


“군인들이 시민들, 심지어 아이들에게도 총을 들이댔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동안, 저는 단지 기록을 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살아 있는 기억 속을 걷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역사관 안의 광주, 사진 속 얼굴들


전시관 내부에는 당시 상황을 기록한 각종 자료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5월 18일 자의 신문 1면, 계엄령 선포 장면, 시민군의 모습, 그리고 그 뒤를 잇는 계엄군의 진입 사진까지.


무엇보다도 가장 오래 눈길이 머문 것은 희생자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이름표도 없이 흑백으로 인화된 사진들. 어떤 이는 눈을 감고 있었고, 어떤 이는 카메라를 마주 보며 어딘가 절박한 눈빛을 띠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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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저는 역사라는 것이 반드시 큰 전투나 거대한 구호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조용히 그 자리에 있었던 얼굴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말은, 침묵보다 더 크게 들렸습니다.


“선진조국의 선봉, 대통령 전두환”


역사관 관람을 마친 후, 어르신께서는 저를 건물 바깥으로 안내해주셨습니다. 고문과 군사재판이 실제로 이뤄졌던 복원 건물로 이어지는 길목, 그 입구 바닥에는 한 비석이 놓여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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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석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습니다.


“선진조국의 선봉, 대통령 전두환.”


한순간 숨이 턱 막혔습니다. 광주 시민들에게 그는 결코 ‘선봉’이 아니라 ‘폭력의 상징’입니다. 그런데도 왜 이 비석이 그대로 놓여 있는 걸까 싶었는데, 어르신이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비석을 기념하려고 둔 게 아닙니다.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돌을 밟고 지나가게 했습니다.”


저는 말없이 비석 위를 밟고 나갔습니다. 발밑으로 느껴지는 단단한 돌의 감촉은, 단순한 구조물이 아니라 한 시대에 대한 저항처럼 느껴졌습니다.



재현된 법정, 그리고 고문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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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내부에는 1980년 당시의 군사재판 법정과 고문실이 재현돼 있었습니다. 법정에는 피고인석과 군인들, 판사역의 군법무관 자리가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고, 피고로 등장한 시민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습니다. 방 안은 싸늘했고, 그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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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으로 이동하자 고문 장면이 재현된 공간이 나왔습니다. 무릎 꿇은 사람, 팔이 뒤로 묶인 사람, 얼굴을 가린 채 웅크린 사람의 형상들이 놓여 있었습니다. 조명도 어둡고, 바닥은 딱딱했습니다. 그곳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어르신은 마지막까지 조용히 곁을 지키셨고, “이게 끝이 아닙니다. 아직도 진상규명이 안 된 부분들이 있습니다. 기억해 주셔야 합니다.”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오월을 딛고 선 오늘의 광주


밖으로 나오니, 바로 옆 너른 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도로위로 들은 바쁘게 지나갔습니다. 해는 쨍쨍했고, 바람은 따뜻했습니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일상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그날 거리로 나선 사람들의 뜻이 오늘에 닿았다는 증거라는 것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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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이 자유를 어디서부터 기억하고 있습니까?


5·18 자유공원은 지금도 ‘민주주의’라는 말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장소입니다.

돌 위에 새겨진 이름을 밟고, 어둡고 좁은 복도를 지나, 끝내 바깥으로 나왔을 때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자유는 저절로 오지 않았습니다. 그곳은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한, 자유와 정의의 증거입니다.


저는 그날, 한 증언자의 말에서 가장 깊은 울림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광주는 오늘도 묻고 있었습니다.


“당신은 이 자유를, 어디서부터 기억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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