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75주년을 맞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곳
지난 여행에서 다녀왔던 철원의 노동당사 건물을 기억하시는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 처연한 흔적이 아직 마음에 남아 있던 터라, 이번에는 그 길을 조금 더 따라 올라가 백마고지 전적비를 찾게 되었습니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말이 누운 형상을 닮았다는 백마고지(白馬高地).
하지만 단지 지형 때문만이 아니라, 1952년 10월 치열했던 전투가 있었던 곳으로도 유명합니다.
당시 중공군과 북한군이 남한의 곡창지대까지 침탈하려 했던 중요한 고지, 그야말로 한반도의 운명이 걸렸던 땅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단일 고지전 중에서도 가장 많은 인명 피해와 포탄이 오간, 말 그대로 피로 지켜낸 고지입니다.
낡은 비석, 낡지 않은 기억
도착해서 처음 마주한 것은 약간 바래고 낡은 안내 비석이었습니다.
오래된 돌판에 새겨진 글씨는 비록 선명하진 않았지만, 오히려 그 세월의 흔적이 이곳이 품고 있는 비극과 저항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주는 듯했습니다.
고지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리고 전체 철원평야를 지키기 위해, 이곳에서 무수한 젊은 생명이 흘린 피는 결코 시간 속에 묻혀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말이 누운 듯한 언덕, 그리고 백마 동상
백마고지라는 이름은 처음 들으면 꽤 시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전투 중 포탄으로 무너진 능선이 하얗게 드러난 모습이 백마가 누운 모습과 닮았다 하여 붙여졌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능선을 바라보니, 언덕 위에 세워진 백마 동상이 그 의미를 더욱 또렷하게 해주는 듯했습니다.
그저 상징이 아니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누워야 했던 수많은 생명들의 형상 같았습니다.
태극기를 따라 걷는 길, 작은 기념관까지
백마 동상에서 이어지는 길에는 양옆으로 태극기가 줄지어 펄럭이고 있었습니다.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아담하지만 정성스럽게 꾸며진 백마고지 기념관에 도착하게 됩니다.
기념관 안에는 10일간의 전투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 포탄과 무기, 병사들의 기록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포탄 수십만 발이 오갔다' ‘고지의 주인이 무려 12번이나 바뀌었다’는 문장을 보고는,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침략자는 끈질겼고, 지켜야 하는 이들은 더욱 간절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고지에서 피를 흘리고 또 흘렸을까요?
전적비 너머로 보이는 GOP 소초
기념관을 나오면 곧 백마고지 전적비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멀리 보면, 저 너머로 GOP 경계 소초가 어렴풋이 보입니다.
그 순간, 문득 이 땅이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나라임을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70년이 흘렀지만, 북녘의 위협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입니다.
평화로운 산책길이지만, 그 끝에는 지금도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이 서 있는 현실.
그 풍경이 더없이 조용하고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잊힌 전쟁'이라는 말 앞에서
올해는 6·25 전쟁 75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서양에서는 이 전쟁을 종종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그 표현이 처음엔 마음 아팠습니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을 앗아간 전쟁이었는데, 외부에서는 그렇게 쉽게 잊혔다는 사실이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을 생각해 보면, 이토록 눈부신 발전을 이뤄낸 나라가 한때 전쟁의 상흔을 겪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 오히려 그래서 ‘잊혔다’고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전쟁은 끝났지만, 아직도 종전이 아닌 휴전 상태라는 점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없기를
백마고지에서 내려오는 길.
눈앞에 펼쳐진 철원의 평야는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하지만 그 아래에는 이름 없이 묻힌 이들의 피와 희생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평화는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 평화를 위협하는 적대 세력이 지금도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버티고 있다는 사실 또한 우리가 직시해야 할 현실입니다.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 땅을 위협하는 어떠한 침략도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기억해야 하고 대비해야 합니다.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기를.
다시는 백마가 누워야 하는 일이 없기를.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이 평화가 영원하길 진심으로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