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보다 마음을 , 세속보다 꿈을 그린 화가의 발자취
조선 시대는 성리학의 나라였습니다.
유학이 아닌 다른 학문은 ‘잡학’으로 불리며 홀대받았고, 예술은 벼슬길과는 무관한 여흥쯤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런 시대에도 오직 그림 실력 하나로 이름을 남긴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안견입니다.
충남 서산 지곡면, 조용하고 작은 마을 끝자락에 안견기념관이 있습니다.
그의 본관이 ‘지곡 안씨’라 해서 지곡이라 불리게 된 것인지, 혹은 이 마을 이름에서 본관을 따온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건, 이곳이 예술가의 혼이 되살아난 자리라는 사실입니다.
안견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세종대왕 시절 도화서의 정4품 호군을 지냈다고 하죠.
당시 도화서는 왕실의 공식 화가들이 근무하던 기관으로, 국가의 의식과 의장, 지도, 초상화 등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초상화, 사군자, 의장도 등 다방면에 능했지만, 무엇보다도 빛났던 분야는 산수화였습니다.
그는 자연을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린게 아닌 산과 강, 구름 속에 인간의 철학과 이상을 담았습니다.
1447년 어느 날, 안평대군이 기이한 꿈을 꾸었다고 합니다.
그는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이상향, 무릉도원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안견은 붓을 들어, 그 꿈의 풍경을 한 폭의 그림으로 옮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몽유도원도〉입니다.
이 작품은 현실의 산수와 이상 세계가 한 장면 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독창적인 구성을 보여줍니다.
왼쪽에는 인간의 세계, 오른쪽에는 안평대군이 꿈에서 본 도원향.
안견은 잔잔한 붓놀림으로 현실과 이상, 깨어 있음과 꿈의 경계를 그려냈습니다.
이 한 폭의 그림은 훗날 양팽손, 신사임당 같은 조선의 화가들은 물론, 일본의 슈분 등 동아시아 예술계 전체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안평대군은 이 그림을 보고 감탄하며, 직접 시를 써 작품에 남겼다고 합니다.
하지만 예술과 권력의 인연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안견은 안평대군의 총애를 받았지만, 언젠가부터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대군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죠.
어느 날, 대군이 아끼던 귀한 먹이 사라졌고 추궁 끝에 안견의 품에서 그 먹이 나왔다 합니다.
분노한 대군은 그를 내쫓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양대군이 김종서 등 권신을 죽이고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등극합니다. 이른바 계유정난 이라는 사건이지요.
그 계유정난에 연루된 안평대군은 유배 끝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속삭였습니다.
“안견은 이미 그 일을 예감했던 게 아닐까?”
“일부러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눈 밖에 난 것은 아닐까?”
사실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가 세속을 넘어선 예술가의 직감을 지녔던 사람임을 느끼게 됩니다.
안견기념관은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벽마다 그의 생애와 화풍이 차분히 전시되어 있었고,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바로 앞서 설명한 〈몽유도원도〉의 영인본이었습니다.
원본은 지금 일본 나라현 덴리대학 중앙도서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일본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으로 참전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조선에서 약탈해 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후 일본 정부는 이를 사쓰마번 시마즈 가문의 소장품으로 등록했고, 여러 손을 거쳐 1955년경 덴리대학으로 옮겨졌습니다.
아쉽게도 이 작품이 한국 땅에 잠시 돌아온 건 단 세 번뿐이었습니다.
기념관의 영인본은 실제 크기에 가깝게 복원되어 있어 그 앞에 서면 마치 꿈속의 도원으로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듭니다.
그림 속 산은 흐르고, 구름은 길이 되어 이어지며, 현실과 이상이 하나의 풍경으로 녹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사실이 한편으로는 마음 한켠을 서늘하게 합니다.
물론 여러 역사적, 정치적, 외교적 사정이 있었겠지요.
하지만 언젠가, 그 한 폭의 꿈이 다시 서산 지곡의 하늘 아래 돌아오는 날을 조용히 기다려 봅니다.
조선은 철저히 이성과 규범의 나라였습니다.
그 안에서 예술은 언제나 곁가지에 불과했지요.
하지만 안견은 그 조선의 질서 안에서조차 ‘꿈을 그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붓으로 철학을 썼고, 산수 안에 인간의 이상을 담았습니다.
그는 권세보다 마음을 택했고, 세속보다 꿈을 그렸습니다.
이 작은 기념관에서, 역설적으로 저는 안견이 그려낸 조선의 예술이 얼마나 자유로웠는가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도 필요한 건 현실을 잠시 벗어나, 자신만의 도원을 그려볼 용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