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는 아이의 우주가 되어주는 일.
"나는 아이를 키우면서 울면 안되는줄 알았다."
나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다. 슬픈 영화를 보면 혼자 훌쩍거리고, 길에서 누군가 우는 것만 봐도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이 고이던 사람.
내 감정의 물결이 조금만 흔들려도 금세 흘러넘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나는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 들었던 말들 때문이었다.
아기 낳을 때 너무 울면 시력이 나빠진다, 우울한 감정이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엄마가 흔들리면 아이도 불안해진다…
이런 말들이 하나둘씩 머릿속에 꽂혔다. 그때부터 울컥해도 참아야 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출산 후에 이유도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날이 많았다. 피곤해서인지, 무서워서인지, 아니면 그냥 호르몬 때문인지 감정이 흐릿하게 뒤섞여 올라오는 순간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눈물을 삼켰다. “이러면 안 된다.” “엄마는 강해야 한다.” 그 말들을 방패처럼 들고 버티려 했다.
밤에 아이가 잠들고 나면 문득 가슴이 꽉 차서 터질 것 같아지는 날들이 있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데도 그마저도 울면 안 될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눈물을 보이면 약해진다’는 것을 어디서 배웠는지도 모를 기준이 나를 계속 붙잡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깨닫게 되었다. 내가 울음을 참는다고 해서 강해지는 건 아니라는 걸. 울지 않는다고 해서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는 것도 아니라는 걸. 눈물을 삼키는 동안 오히려 내 마음만 더 멍들고 있었다.
나는 아이에게 밝은 엄마이고 싶었지만 억지로 웃는 얼굴은 오래가지 못했다. 오히려 조금 울고 나면 내 감정의 바닥을 한 번 닦아낸 것처럼 조금 더 가벼워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이런생각이 들었다. 아이도, 나도 ‘사람’인데 사람이 어떻게 울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어쩌면 아이에게 보여주면 안 되는 건 눈물이 아니라, 눈물을 참느라 무너져가는 엄마의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믿기로 했다. 울어도 된다. 흐르는 눈물 때문에 아이가 상처받는 게 아니라 그 눈물을 통해 더 따뜻해질 수도 있다.
엄마가 울어도 엄마는 엄마다. 더 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사람다워지는 것일 뿐이다.
"나보다 아이가 먼저였던 시간."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 가장 크게 바뀐 건, 하루의 중심이 완전히 달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엔 눈을 뜨면 나부터 챙겼다. 세수 한번에 샤워까지 이어서 하고, 여유 있게 커피를 마시고, 그날 입을 옷을 고르는 데 적어도 몇 분은 썼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난 후의 아침은 늘 비슷했다.
내가 아니라 아이가 먼저였다.
아이가 배고파 울면, 내가 마시려던 커피는 그대로 식어갔고, 잠깐 앉아 쉬려는 순간엔 기저귀를 갈아야 했고, 머리라도 묶어볼까 싶으면 또 아이가 나를 찾았다.
어쩌면 별일 아닌 작은 일들이지만, 그 순간마다 자연스럽게 내가 뒤로 밀렸다. 예전엔 배가 고프면 바로 식탁 앞에 앉았던 내가 어느새 아이 먹이고 치우고 설거지한 뒤에서야 “아, 나도 배고팠지…” 하고 늦게야 떠올렸다.
샤워는 선택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날이면 하는 것.” 그런 생활이 당연해져 있었다. 머릿결이 엉켜 있어도, 끈적함이 느껴져도 “지금 아니면 또 언제 하지…” 하면서 초스피드로 끝내야 했다. 그래도 중간에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면, 샴푸도 못 헹군 채 나가야 했다.
외출 준비는 더 분명했다. 내 가방보다 아이 가방이 먼저였고, 내 화장보단 아이 모자가 더 중요했고, 내 신발끈을 묶기 전 아이의 양말이 맞는지부터 확인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나는 언제부턴가 나보다 아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되어버렸구나.’
그런데 아이를 먼저 챙기고, 아이의 일과에 맞춰 내 하루가 움직이는 그 모든 순간이 ‘내가 나를 잃어버리는 과정’이라고만 생각했던 건 지금 생각하면 조금 바보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사실은, 그건 나를 잃는 시간이 아니라 내가 ‘엄마’라는 다른 모습으로 확장되는 시간이었다.
내 우선순위가 나에서 아이로 옮겨간 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또 다른 나에 맞게 성장하고 있었다.
아이가 먼저였던 순간들은 나를 힘들게도 했지만 그만큼 나를 강하게 만들기도 했다. 내 하루의 중심을 바꿀 만큼 누군가를 사랑하는 경험은 엄마가 되고 처음 알게 된 감정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아이가 먼저였던 순간들은 ‘내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내가 넓어지고 단단해진 시간’이라고.
"나의 감정은 언제 말해도 될까? "
아이를 키우다 보면 늘 당연하게 아이의 상태와 감정부터 살피게 된다. 배가 고픈지, 졸린지, 무서운지, 속상한지…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보느라 정작 내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 나는 늘 한 발 뒤에 있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나는 내 감정을 잘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슬프면 울어버리면 될 것 같은데참았고, 불안하면 누군가에게 말하면 될 것 같은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엄마가 되고 나서는 더 그랬다. ‘내 감정은 나중에’, ‘지금은 아이 먼저’, 그게 자연스러운 공식처럼 굳어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에게 감정을 설명해줘야 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엄마, 나 화났어. 근데 왜 화났는지 모르겠어.” 작은 입술로 떨리는 목소리.
나는 아이가 자기 감정을 조금 더 잘 이해하길 바랐다. 그래서 말하려고 했다. “화날 때는 이렇게 말해도 돼. 슬플 때는 슬프다고 말할 수 있어.
기분이 이상하면 이상하다고 말해도 돼.”
그런데 그 말을 하는 순간 가슴이 콩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내 감정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아이에게 감정을 솔직히 말하라고 설명하고 있었을까?
아이에게 다양한 감정을 알려주고 싶었다. 화도, 서운함도, 슬픔도, 그리고 그런 감정들이 모두 괜찮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나는 화가 나도 “괜찮아” 슬퍼도 “괜찮아” 힘들어도 “괜찮아” 그렇게 감정의 문을 닫고 살아왔던 사람이라는 걸 그 순간 깨닫게 되었다.
아이에게 감정을 알려주려다가 오히려 내가 나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마음속에서 이런 질문이 자꾸 떠올랐다. “그럼 나는 언제 내 감정을 말해도 되는 걸까?” 엄마라서 참아야 했던 시간들, 아이보다 내 감정이 먼저 오는 것이 괜히 죄책감처럼 느껴졌던 순간들, 그 모든 걸 지나오면서 나는 감정을 말하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해온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이에게 감정을 배우게 하려면 엄마가 먼저 자기 감정을 말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그래서 나는 천천히 연습을 시작했다.
“엄마 지금 조금 속상해.” “엄마 피곤해서 잠깐 쉬고 싶어.” “이건 엄마도 마음이 아파.”
그러면 아이는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반응했다. “아, 엄마도 그런 기분이 드는구나.” 그 말에 이상하게 마음이 풀렸다.
내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이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게 아니라 감정이란 게 원래 이렇게 흘렀다가 돌아오는 거라는 걸 함께 배우는 순간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이에게 감정을 알려주는 일은 결국 나에게도 감정을 허락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의 감정은 언제나 말해도 된다.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내가 내 감정을 말할 수 있을 때아이도 자기 감정을 숨기지 않는 사람이 될 테니까.
육아는 엄마를 작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 아이의 우주가 되기 위해 엄마가 더 크게 자라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