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누군가의 딸이었다.
엄마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닫는 것들이 있다. 그중 하나는, 나도 누군가의 딸이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품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이 작은 사람처럼 누군가의 하루를 뒤흔들던 존재였다는 것.
그런데 아이를 키우며 바쁘게 살아가는 동안, 나는 그 어린 날의 나를 종종 잊어버리고 살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늘 ‘처음’의 연속이다. 처음 열이 펄펄 끓던 날, 처음 친구에게 상처받고 울먹이던 날, 처음 내가 아이에게 큰소리를 내고 후회했던 밤. 그 모든 순간이 아이에게도 처음이지만 엄마인 나에게도 새로운 감정의 문을 열어준다.
그 문이 열릴 때마다 나는 문득 잊고 있던 나의 어린 시절과 마주한다.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전정에서 울던 나, 마음이 상해서 괜히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숨던 나, 잘하고 싶지만 잘 안 되는 게 많아 속상해하던 나.
그때의 ‘나’를 이해하지 못했던 시간들이 이제야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한다. 아이를 통해 나는 나에게도 천천히 돌아가고 있다.
감정의 언어를 배우는 중
나는 원래 감정이 많은 사람이었다. 누가 울기만 해도 금세 같이 눈물이 맺히고, 슬픈 영화를 보면 한참 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이를 낳고 난 뒤부터 나는 감정을 쉽게 꺼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이 앞에서 울면 안 된다.’ ‘엄마가 너무 예민하면 아이만 불안해진다.’ ‘울면 시력이 나빠진다더라.’ ‘부정적인 감정은 아이에게 전달된다.’ 이런 말들이 어느 순간 내 머릿속 깊이 박혀 있었다.
나도 모르게 감정을 숨기고, 울음이 차오르면 꾹 눌러 담고, 눈물이 날 것 같으면 고개를 살짝 돌려 참았다. 그렇게 나는 엄마라는 이름에 기대어 내 감정을 뒤로 미루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아이가 울면서 물었다.
“엄마는 안 슬퍼?” 그 질문 앞에서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슬펐지만 말하지 않았던 나, 힘들었지만 괜찮은 척했던 나. 아이에게 감정을 설명해주어야 하는 순간에 정작 나는 내 감정을 한 번도 솔직하게 말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아이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도 슬플 때 있어.” “화날 때도 있고, 속상할 때도 있어.” 처음엔 어색하고, 입술에 힘이 들어갔고, 말끝이 떨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내 안에 묶여 있던 감정들이 조금씩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아이에게 감정의 언어를 가르쳐주기 위해 나는 결국 나의 감정도 다시 배우는 중이었다.
나도 자라는 중이다
아이를 키운다고 해서 나의 시간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단지 조금 뒤로 밀려났을 뿐. 나는 엄마가 되는 순간 성장이 멈춘 줄 알았다. 그런데 아이를 키우면서 깨달았다. 나는 멈춘 게 아니라, 다른 방향으로 자라는 중이었다는 걸.
아이를 기다려주는 법을 배우면서 나는 내 감정도 기다릴 줄 알게 됐고, 아이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과거의 나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아이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려고 애쓰면서 나에게도 다정할 용기가 조금씩 생겼다. 엄마라는 이름은 나를 묶어두는 이름이 아니라 나를 확장시키는 이름이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의 딸이고, 이제는 누군가의 엄마이기도 하며, 동시에 나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이다. 그 셋을 억지로 한 줄로 세우기보다 조금씩 균형을 잡으며 살아가는 법을 나는 이제야 배워가고 있다.
아이 덕분에 다시 시작되는 나
아이들은 내가 잊고 살던 감정의 언어를 다시 꺼내 준다. ‘기쁘다’, ‘속상하다’, ‘무섭다’, ‘고맙다’, 그리고 때로는 ‘미안하다’, ‘지쳤다’ 같은 말들까지. 아이에게 “감정은 솔직하게 말해도 돼”라고 가르치다가 나 자신에게도 그 말이 필요했다는 걸 알게 됐다. 아이를 키우는 시간 속에서 사라진 줄 알았던 나를 다시 만난다. 아니, 사라진 게 아니라 잠시 접어두었던 것뿐이었다. 아이와 함께라서 더 힘들기도 하고 아이와 함께라서 더 단단해지기도 한다. 엄마라는 이름은 그 과정 전체를 껴안고 살아가는 또 다른 나다. 나는 여전히 자라는 중이다. 아이와 함께 배우고, 아이와 함께 흔들리고, 아이와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그 성장의 한복판에서 잊고 살던 ‘나’라는 사람을 하루하루 다시 세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