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이라는 데이비드 리스먼의 책이 세상에 나온 지 70년이 넘었다. 당시에도 미국 사회 상황을 명쾌하게 분석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일단 70년이 지났는데 내가 알고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사실 이런 '군중 속의 고독'은 지금이 더 심각하다. 군중의 범위가 전 세계로 넓어졌고, 실시간으로 군중들의 행복한 모습들이 업데이트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반사적인 고립감은 더 심해진다.
사람들은 Z세대의 특징으로 자기중심적인 사고방식을 이야기한다. 타인의 상황이나 감정에 신경 쓰기보다 자기 자신을 위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남이 기분이 나쁘거나 상황이 안 좋은 것에 공감해주기보다 자신의 상황이 좋지 않거나 기분이 좋고 나쁨이 더 우선한다. 그리고 그런 자기 자신에 맞춰 공감해주고 신경 써주는 사람을 원한다.
모든 것에는 작용 반작용이 있다. 그런 자기만을 신경 쓰는 사람들과 동시에 극도로 타인만을 신경 쓰는 종류의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자기 자신을 돌보기보다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보일 것인가만을 신경 쓰며 살아가는 FOMO증후군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다룬 바가 있다. 극과 극처럼 보이는 두 가지 양상이지만 사실은 크게 다르지는 않다.
본질은 결국 '내'가 어떻게 보이는가에 있다. 그리고 타인이 자신을 알아주기를 바란다는 점 역시 공통적인 사안이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다양한 '소속' 가지고 태어난다. 물론 옛날이라고 해서 소속이 없지는 않았다. 어디에서 누군가에게서 태어난 이상 소속은 보통 존재했다. 심지어 버려진 아이다 하더라도 살아남았다면 자신이 살아가는 곳에서 소속이 정해졌다. 적어도 '사회'라는 테두리에서 언어를 사용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은 그랬다. 정글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은.
하지만 그들의 소속은 크게 다양하지 않았다. 대부분은 가정이나 지역사회에 그쳤다. 사실 이전 세대에는 자신의 어디 소속의 누구인지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이 접하는 사회라고는 대부분 로컬이었다. 예컨대 한국 사람이다 하더라도 굳이 한국 사람이고 아니고 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어느 지역 사람인지도 신경 쓰지 않고 한 지역에 계속 살면 그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사회의 인식이라는 것은 가정이나 마을 정도의 아주 작은 단위뿐이었고, 그들이 사회나 공동체로 인식하고 살아야 하는 것도 딱 그 정도였다. 그래서 더욱 공동체 의식은 강할 수밖에 없었다.
현시대는 많이 다르다. 태어나면 가정과 지역에 소속되어있고, 어릴 때부터 한국인이라는 상황도 철저하게 교육을 받는다. 더 이상 '외국'은 낯선 곳이 아니다. 평생 가도 만날 일 없는 곳이 아니라 언제 마주칠지 모르는 이웃이다. 지금의 사람들이 태어나자마자 인식해야 하는 사회나 공동체의 범위는 거의 지구 전체라고 할 수 있다. 브런치 글만 쳐다봐도 내가 가보지 못한 곳들에 대한 글이 넘쳐난다. 중세 사람들을 신기하게 만들었던 '동방견문록'이 하루에 수천수만 개씩 쏟아지는데 더 이상 신기하게 볼 일은 없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사회와 공동체에 대한 인식은 약해졌다. 가정, 학교, 지역사회 같은 밀접하게 와닿는 공동체에 집중하면 좋겠지만 인터넷과 글로벌 세계는 우리에게 더 넓은 사회를 기준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계속 제시한다. 예전에는 어쩔 수 없어서라도 공동체에 자신을 맞춰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면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수많은 공동체가 있고 그 사이를 옮겨 다니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이렇게 넓은데 어딘가는 자신을 이해해주는 공동체나 사회가 있을 수밖에 없다.
약간 비틀어서 보자면 일본의 토요코 키즈도 그런 인식의 발로 중 하나다. 대부분은 이러한 방식으로 인터넷이나 통신망을 통해서 자신과 맞는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한 사회를 구성한다. 그 사회가 옳고 그른지, 아니면 그 공동체가 건전한지 따위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 그 공동체가 자신을 공감해주는지,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지, 또는 자신이 원하는 무언가 욕망과 닿아있는지가 중요하다.
결국 현 Z세대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본다면 '자기밖에 모른다'가 아니라 '사회'와 '공동체'라 불리는 집단을 보는 인식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선택지가 많다. 그들이 속했거나 속할 수 있는 사회가 너무 많기에 발생하는 문제다. 그들이 겪는 문제는 조금 더 개인적인 문제가 크고, 감정적인 문제가 많아졌다. 그들이 사회를 이탈하는 게 '생명의 위협'을 느껴서가 아니라 그저 감정의 동요와 고립에 의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옛날이라면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모르는 미지의 사회로 도망쳐야 했기에 상황이 극도로 나빠지지 않은 이상 익숙했던 사회를 이탈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이전에 자유로운 야만인들의 시대 글에서 '토요코 키즈'를 다루면서 말했듯이 '이탈자들'인 가출 청소년들이 더 이상 숨지 않는다. 그들이 선택한 것은 더 이상 '도망'이 아니라 '이탈'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네트워크와 인터넷으로 쉽게 연결된다. 어릴 때 우리가 일방적 매체인 TV로 본 연예인에게서도 친근감을 느꼈는데 쌍방향 매체인 인터넷과 모바일에 노출된 청소년들은 쉽게 새로운 관계에 노출된다.
'사회'는 이제 복잡한 대상이 아니다. 가족, 친족, 학교와 같은 공동체들이 무너져내리는 근원이다. 쉽게 옮길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쉽게 무너진다는 이야기와 같다. 물질 만능의 사회도 그런 것을 부추긴다. 사람들은 '연'이나 '정'을 찾아서 이동하지만 막상 '연'과 '정'에 얽매이지 않는다.
옛날에는 '지음'이니 '지기지우'니 하면서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평생에 걸쳐서 찾아 헤맨다고 했다. 그들은 인터넷이 없었으니까. 지금의 아이들은 쉽게 유튜버를 꿈꾸고 타인에게 보여줄 수 있다. 심지어 내가 밥 먹는 것만 찍어도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있다. 나의 행동에 공감하거나 관심을 보여주는 타인도 금방이고, 나와 소통해 줄 타인을 만나는 것도 금방이다. '나'에게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도, '내'가 관심을 가질 사람도 찾기 쉽다. 세상은 그렇게 쉽게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는 끊기기도 쉽다.
사회는 그걸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의외로 사회는 그 방향을 원한다. 말로는 걱정하는 척 하지만 실제로는 그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다. 지구의 어딘가에서는 여전히 생명의 위협에 맞서서 전쟁에 신음하는 곳이 있지만 상관없다. 다른 선택지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현실을 외면한다. 원하면 얼마든지 연결을 끊어버릴 수 있다는 거다. 나 이외의 사람들이 어떤 피해를 당하더라도 더 이상 내일처럼 느끼지 않는다. 세월호 사고처럼 너무도 강렬하고 직접적인 사고조차도 결국 '남의 일'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으니까.
쉽게 외면할 수 있는 사회는 언젠가 위험에 빠졌을 때 같이 싸워줄 사람을 다 잃게 될 것이다. 너무 많은 것 같았던 선택지는 생각보다 얇은 끈으로 이루어져 있다. 줄은 많지만 그 줄의 대부분은 얇디얇은 거미줄이다. 'www'자체가 '거미줄'을 의미한다. 끌어당겨줄 수도, 잡고 올라갈 수도 없는 그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