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내내 부지런하게 나쁜 악인도 존재할까?
예전에 그런 말을 많이 했다. 나쁜 일을 하는 것이 착한 일을 하는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쉽다고.
사실이다.
쓰레기를 길에 바로 버리는 것이 잘 갖고 있다가 휴지통을 찾아서 버리는 것보다 쉽다. 신호등이 바뀔 때를 기다려서 건너는 것보다 무단 횡단하는 게 더 쉽다. 줄 서서 기다리기보다 새치기하는 게 빠르다. 정당하게 급여를 모아서 돈을 버는 것보다 투기를 하는 게 돈 버는 것도 빠르다. 마음이 불편한 것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그래서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기 위해서 감수해야 하는 피로감이 더 크기 때문에, 평균으로 수렴한다고 치면 착한 일과 좋은 일보다 나쁜 방향으로 수렴하기 쉽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도덕적 의식이 높아서 마음의 불편함에 의한 피로감이 더 크다면 그렇게 되지 않겠지만.
그런데 그것과 좀 다른 이야기가 있다.
24시간, 매 순간 부지런하게 나쁜 일만 하는 건 어떨까?
과연 24시간 좋은 일만 하는 것보다 편할까?
그저 가정이지만 나는 어떻게 생각해봐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싶다. 24시간 매 순간 부지런하게 나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라도 그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가장 큰 이유는 '선악 구분이 없는 행동'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럴 때는 아무 의미 없는 행동조차 나쁘게 해야 한다는 것 역시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하는 것'이나 '편한 대로 하는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나쁜 일도 피곤하다 보니 부지런해야 한다. 게으른 자들은 악인을 하기엔 글렀다. 나도 그래서 악인은 아닌 듯.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에 선악이 섞여있다.
아무리 악인이다 하더라도 좋은 면을 부각하고 조명하면 다르게 보인다. 완벽하게 나쁜 악인은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흉악한 범죄자나 심지어 인종학살을 자행했던 사람들의 삶에서 조차도 그게 가능하다.
엄청난 수준의 범죄자들도 그럴진대 그 이외의 사람들은 어떨까?
누군가 마음만 먹는다면 그들을 악마로, 천사로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어떤 사람도 완벽하진 않으며 심지어 모든 행동이 옳고 그름의 판정 안에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밥을 혼자 먹었는가 둘이 먹었는가가 옳고 그름의 행동은 아니겠지만 어떻게 조명하느냐에 따라서 충분히 그런 시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사람들의 행동에 대한 면죄부로 꺼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 반대의 입장이다. 별거 아닌 말과 글에 인문학을 억지로 끌어다 붙이는 내 입장에서는 그럴수록 명확한 관찰과 인식이 필요하다. 본질을 놓치지 않는 인지능력은 매우 중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통찰은 더 좋다.
그런데 이게 객관화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 내가 늘 말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가장 망해버린 키워드가 '평가'가 되어버린 것이다. 무언가를 평가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노력과 관찰이 필요한데, 이 시대의 평가와 심사는 신뢰를 잃어버렸다. 심지어 사회의 근간인 법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레미제라블'이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건만 현실은 그보다 더하다. 장발장은 피해자의 이야기였지만 현실은 법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자들의 이야기다.
주변에 가상화폐로 꽤나 많은 돈을 벌었던 사람이 있었다.
주식으로 돈을 번 사람도 꽤 있다. 부동산으로 몇 억 이상 챙긴 사람도 꽤 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친다는 것이다.
투기로 돈을 버는 것이 더 빠르고 강렬하고 많은 돈을 벌지만, 실제로는 이들도 지속 가능한 경제를 원한다. 하지만 자신 이외의 사람들이 자신보다 빨리 돈을 벌까 봐 두렵다. 그래서 계속 '피곤한 나쁜 일'을 반복한다. 심지어 리스크도 크다. 결국 지쳐 나가떨어진 사람들은 다시 '지속 가능한 경제'로 돌아온다. 물론 돌아오지 못할 만큼 멀리 간 사람들은 예외다.
다른 글에서 주제로 삼았던 '지속가능성'이 망한 시대인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의 머릿속에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열망은 남아있다. 단지 지금 눈앞에 강렬함과 타인보다 앞서고 싶은, 또는 뒤쳐지기 싫은 경쟁심이 그 '지속가능성'에 대한 마음을 누르고 행동하도록 만들고 있을 뿐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투기' 조차도 '지속가능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것을 위해 눈이 뒤집혀 과격한 언행과 활동과 행위들을 하기도 한다.
10대의 내 인생 모토는 이불을 세게 걷어차야 될 수준이니 넘어가고, 20대의 내 인생 모토는 '편하게 살자'였다. 그게 결코 나쁜 일을 하면서 살자는 것은 아니었다. 타인에게 불편을 끼치는 편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었다 보니 모순이 많이 발생했다. 나 스스로는 '안 편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편하게 살자는 모토를 잡았다'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우리는 항상 얻지 못한 것을 목표로 삼으니까.
30대는 인생의 모토를 세울 수 없었다. 30대가 되면서 내 인생은 나만의 인생이 아니게 되었다. 그게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를 책임진다는 게 아니라, 누군가 나의 책임도 같이 떠안아주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40대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인생 모토는 세우지 못했다. 어느새 나도 길게 보면서 '지속가능성'을 바라보고 가기보다 지금 내 발밑을 살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내가 한때나마 그러한 것을 원했다는 것을 지금 이런 방식으로, 글로나마 남아있기를 바라고 글을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