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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해 Mar 19. 2021

진짜진짜 서른

여러 개의 나이


서른의 생일을 맞았다. 올해 겨울은 오래간만에 겨울다운 혹독한 추위를 보여줬다. 나는 겨울 중에서도 제일 춥다는 소한에 태어났다. 대한이 소한 보러 왔다가 도망갔다고 하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눈이 펑펑 내렸다. 도로에는 차가 움직이지를 못해서 꼼짝 얼어붙었고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아이들은 펑펑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작은 눈사람을  앞에 만들었다. 태어나  내리는 것을 처음 보는 노르웨이  품종의 고양이는 창문을 열어주니 금방이라도 아래로 낙하할 것처럼  눈에 매료되어 고개를  빼고 눈을 맞았다. 부드러운 여린 털이 물에 젖어 축축해졌다. 눈에 강렬히 료된 어린 고양이는 이후 높은 층의 절벽에서 떨어졌고,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런 해프닝이 있었다. 모질고 서러운, 격정적인 사건이.

생일을 맞은 나는 외식을 하고 싶었다.  때 묻은 나무 트레이 위에 각각의 예쁨이 있는 그릇들이 놓여있고  안에 정갈하고 정성 있게 담긴 음식을 먹고 싶었다. 메인으로는 전혀 멋을 들이지 않았지만 언제 먹어도 맛있는 가츠돈이나 오므라이스 같은. 따듯하게 계란 옷을 입은 .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고 보니 그거면 충분하다고, 이미 머릿속으로 밥을   떠먹는 상상을 했다. 그러나 저녁이 되어, 눈은 순식간에 세상을 두꺼운 겨울 이불로 덮었다. 고민을 하다 배달을 시키려고 하고 보니 배달마저 되는 곳이 하나 없었다. 결국 라면을 먹기로 하고 J홈메이드 라면을 끓여줬다. 양배추와 파를 볶아 야채 육수를 조금 내고, 가래떡을 썰어 넣은 라면. 늦은 저녁에 맛있는 냄새가 솔솔  수록 점점 배가 고팠다. 코로는 찌릿하게 들어오는 정겨운 냄새가 가득했고 눈으로는 크리스마스 카드에나 그려져 있을 법한 새하얀 풍경이 있었다. 손으로는  세상 가장 보드라운 고양이의 털을 만졌다. 완벽한 생일이었다.

고립된 사람들처럼 자리에 앉아 계속 따듯한 물과 차를 마셨다. 발에는 난로를 쬤다. 배부르게 밥을 먹고 모여 앉은 셋은 아주 어릴  얘기부터, 현재의 고민까지 술술 말이 오고 갔다. 사람들과 대화를   가끔 말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날이 있는데, 그럴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막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혼자로 꽉 찼던 막이 점점 커졌다. 온실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전적으로 평온한 상태와 마치 아주  곳으로  있는  같은 기분이었다.

친구들에게 나는 공표하듯이 새해 다짐을 이야기했다. 사라지지 않는 마음속 야망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열망하는 소원  가지를 촛불을 불기 전에 빌었다. 이루어질 거란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으면서 원하는 마음은 점점  간절해진다. 친구들은 나에게 원하는 것을 잃지 않는  중요하다고 말했다. 거의 생떼에 가까운 나의 말을 언제나 어화둥둥 다독여준다. 생일날 유난히 아이처럼 갖은 생떼를 써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것마저 귀엽다고 말해주는 친구들이었지만. 기분 좋은 상태의 편안함을 느낄 새도 없이 나는  불안이 일렁인다. 불안은 언제나 나와 함께한다,  해도 어김없이. 나이의 앞자리가 변해도 어김없이 나를 따라다닌다.

며칠  컴퓨터를 확인하는데 아이메시지에 주앙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내용의 문자가 와있었다. 주앙을 만난 것은 벌써 3 . 아니 이제 4 전의 일이다. 만으로 25살의 여름, 나는 포르투갈의 도시 포르투에서 여름을 보내고 있었다.

모니카라는 친구와 당시  집에서 지냈다. 모르는 사람과  집에서 그렇게 길게 살아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모니카는 윗집에 살고 있는 안드레와 오랜 친구여서 언제나 우리 집에는 안드레와 모니카  이렇게 셋이 함께였다. 슈퍼싱글 침대에 셋이 포개고 누어 드라마를 같이 보거나  열두 시가 되어 문이 닫기 전에 포장해온 프란 세지냐를 나눠먹었다. 프란 세지냐는 포르투갈의 전통음식으로 얇게  햄과 고기를 샌드위치처럼 포개고  위에 치즈를 덮은, 각진 네모 형상을  음식이다. 나는 입맛에 맞지 않아서   먹고 전혀 먹지 않았다.

주앙을 만난 것은 모니카를 통해서였다. 모니카는 당시 학교 교수(돌아보면 시간 강사이거나 그랬던 사람) 데이트를 시작한 이후로 자주 외박을 했다. 모니카는 놀러  교수의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곳에서  친구에 대해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모니카를 데리러   교수와 함께 옆에 친구인 주앙이 따라 들어왔다. 거실이라고 하기에  없이 비좁은 우리의 작은 아파트에, 그보다도 작은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한참을 얘기했다. 그때가 첫 만남이었다. 주앙의 첫인상은 엄청난 열기를  수다쟁이같이 보였다. 사실  떠오른 사람이 있었는데 굳이 얘기하지 않기로 한다.  만남 이후 그는 내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우리는  데이트를 했다. 날씨가  더워지기 시작한 계절이었다. 연일 뜨거운 햇빛에 낮까지 늘어지게 자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근처 카페와 마트 공원 외에는 거의 밖을 나가지 않는 와중에 생긴 외출이라 굉장히 들떴었다. 나가기  친구들과 영상통화를 했다. 데이트 의상을 고르며 고음의 소리를 질렀다. 노트북 스피커로 웃음소리와 새된 소리가 웅웅 울렸다.

도우루 강변 앞에 있는 노천카페에 앉았다. 커피를 시키고 주앙이 나를 위해 피칸파이도 함께 주문했다.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음에도 전혀 입맛이 없어 파이를     먹고 거의 남긴  기억이 난다. 가끔 단편적인 어떤 기억들이 매우 생생하게 기억나는  문득 주앙에게  문자를 읽고 우리의  데이트 생각이 났다. 노천카페에서 마셨던 커피와 뜨거운 햇빛에 인상을 살짝 썼던  미간의 움직임 그런 것들이.

포르투와 베를린  곳에서 짧게 만나고 나의 일방적인 결별로 헤어진 이후 주앙은 매년 생일에 문자를 보내왔다.  해에는 아주 장문의, 두 번째 해에는 그보다는 짧아진 문자를. 그러고 보니 작년에는 문자가 오지 않았었다. 그리고 올해에  문자가  것이다. 처음 그에게 연락이 왔을  나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뒤섞인 감정을 느꼈었다. 두 번째 해에는 약간의 성가심도 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답장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었다. 고민을 하다 아마도 답장을 하지 않았었던  같다.

올해에 문자를 받고선 고마운 감정이 커서  답장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의 존재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이 유독 크게 다가왔다. 다만 문자의 내용은 아직도 정리가 되지 않아서 고민 중이다. 순수하게 그가 반가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영화를 좋아하는 그에게, 기생충을 보았느냐, 아니 이미 미나리까지 보았느냐 묻고 싶기도 하고, 스톡홀름의 추위와 서울의 추위  어디가  추운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고, 심지어 스웨덴의 망한 집단면역 실험은 그곳에서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 지도 궁금하다. 코로나 상황으로 보려고 마음먹어도 절대   없는 사이라고 여겨지니 어쩐지 애틋함과 함께 마음이 놓인다. 다시는   없을  같은 관계는 언제나 죽음과 함께일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현실에서도, 마치 반생 이전 이기라도  것처럼 끝없이 아득하다. 아득함으로 인해  생경해지는 기억들, 그리고 나는 어디서   모를 슬픔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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