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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해 Feb 10. 2021

날짜 지우기

달력의 하루를 지우는 행위


약 10일 정도의 날짜가 달력에 지워져있지 않았다. 지나 보낸 날을 그 날 그 날 빨간펜으로 날짜 칸에 맞춰 대각선으로 긋기-는 올해 새로 생긴 나의 일과 중 하나다. 회사를 다닐 때는 출근을 하고 그 날 해야 할 일을 살펴보며 하루의 시작과 함께 그 날의 날짜에 엑스자 표시를 했다. 그래야 하루가 시작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날짜를 시원하게 지우고서야 그 날을 보낼 마음이 생겼다. 사무실에 갇혀 하릴없이 보내는 시간은 언제나 여러 의식을 통해 마음가짐을 다잡아야만 했다. 매일매일이 견뎌내야 하는 ‘일’ 같았다. 그때는 그런 이유로 사는 게 지겨웠다.

집에 놀러 온 친구와 방바닥에 나란히 드러누워 블라인드 위에 올려둔 달력을 멀리 올려다봤다. 올 해를 함께 살고 있는 내 달력이 - 손에 잡히지 않는 것처럼, 높은 곳에, 아주 멀리에- 놓아져 있었다. 달력에는 21일부터의 시간이 지워져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지난주부터. 나는 달력을 보며 지나간 내 시간을 생각했다. 이런 이유로, 저런 이유로. 아프다는 핑계로, 시간을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하루가 시작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하루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아쉬움으로, 동굴로 들어가자. 깊은 동굴. 혼자 있자. 그곳에.

나에게 할애된 시간을 펑펑 허비해버리면서 마음속에서 어떤 말이 들려왔다.

‘근데,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야.’

이렇게 내 시간을 자의에 의해, 어떤 의지로 흘려보내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일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탁상용 달력 밑에는 형광색의 포스트잇이 붙어 있고 그 위에는 다짐하는 문장이 써져 있었다. 퇴사를 결심하고 회사에서 보낸 시간들의 날들을 과감히 찢어 쓰레기통에 버렸다. 여러 장의 종이를 뜯어내 버리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남아있는 미래의 달들을 기약하며 커다란 느낌표와 함께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포스트잇을 붙이고 그 위에 문구를 손수 적었다. 다짐하고 되새길 말을. 달이 지나도 잊지 말고 스스로에게 보내는 말을. 그 말이 지금 눈에 보이는 - 하루 두 시간이면 뭐가 됐든 될 것이니 글을 쓰자-였다. 아마도 문장의 마지막 어미를, ‘글을 써라’로 바꿔 적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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