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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작까 Jun 25. 2021

58년 개띠 엄마

'수호야, 밥을 먹을 때에는 바르게 앉아서 먹어야 해 엄마 오른팔에 이렇게  기대면 엄마가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잖아? 옳지, 수호 자리에 앉아서 먹는 거야 밥이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엄마와 할머니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지난 주말 아들의 손을 잡고 서울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옥천에 사는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남편이 회사 일정으로 일요일에 집을 비웠고 나는 한동안 찾아가 보지 못했던 엄마의 집으로 갈 마음을 먹었다


아들은 기차를 좋아했고 지상으로 달리는 지하철을 볼 때마다 '기차야' 하고 소리치며 이미 지나가버린 기차 꼬리를 한참이나 바라보며 '또! 또!' 외치며 기차 타길 늘 바라고 바라던 터였던지라 어린 아들과의 기차여행이 그리 겁이 나지 않았다.  경춘선, 경의 중앙선, 1호선을 차례로 갈아타고 서울역까지 가는 일이 엄마로선 간단하지 않은 일이었지만 새로운 전철을 갈아탈 때마다 수호는 신났고 즐거워했다. 수호는 꽤 의젓하고 우리는 괜찮은 팀워크로 무궁화호를 타고 옥천역에 이를 수 있었다


수호는, 외할머니를 '기차할머니'라고 부른다. 이제야 말을 조금씩 하고 있는 아이에게   '외할머니'라는 말을 가르친다는 게 너무 무모하게 느껴졌던 돌 무렵 외할머니 댁  베란다에 서면 옥천역으로  수시로 지나가는 기차를 즐겁게 봤던 상황을 떠올려주며 설명해줬었는데 어느 날부터 외할머니는 '기차함미'가 되어있고 지금은'기차 함 모니'가 되었다


'수호야, 밥을 먹을 때에는 바르게 앉아서 먹어야 해 엄마 오른팔에 이렇게 기대면 엄마가 밥을 제대로 먹을 수가 없잖아? 옳지, 수호 자리에 앉아서 먹는 거야 밥이 먹기 싫으면 먹지 않아도 좋아 하지만 엄마와 할머니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


아침을 먹는 내 곁에서 매달리는 수호에게 최대한 차분히 이야기하려고 노력하는 나를 보며 엄마는 과거의 자신이 떠오른다는 듯 '내가 너한테 그렇게 말로 설명을 하면 주변에서 그렇게 말로 다 언제 설명하냐고 애한테 그렇게 해서 언제 다 가르치냐고 혼이 났었어' 작게 웃음 지으며 낮게 속삭였다


딱 30년 전 엄마가 나를 낳은 그때, 나도 내 아이를 낳았다


가끔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만, 나는 엄마의 대부분의 것을 물려받았다 생김새 성격 말투 가치관 세계관 나 잘난 맛에 사는 것까지 닮았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늘 이야기한다. 겸손해야 한다고  오만한 사람이 되어선 안된다고.. 엄마의 잔소리에 따박따박 대꾸를 하던 때를 지나 오만함을 갖지 않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는 말은 결국 과거의 자신과 많이 닮은 딸의 좀 더 현명한 선택을 위한 걱정 어린 말이란 걸 이제 나는 안다


나는 공부를 못했다. 노는 걸 좋아해서 공부를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데 공부머리가 없었다. 성적은 창피할 만큼 바닥에서 놀았고, 남들은 세 자리 두 자리로 받아오는 점수를 나는 한자리로도 받아온 적이 꽤 있으니 할 말은 다했다.


그런 엄마는 나의 자존감을 채워주기 위해 부단히 도 노력했다 그런 엄마의 노력이 통한 건지 나는 꼬리표 (성적표가 나오기 전 가점 표)가 나오는 날을 빼고는 학교생활에서 기가 죽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반 친구들 평균의 턱밑에도 못 닿는 초라한 성적이 내 성적이었고 꼬리표가 반 게시판에 붙으면  멀리서도 내 점수는 한눈에 보였다. 백점 만점의 한 자리 수라니, 너무 창피해서 내 점수에 샤프로 점을 찍어 가려버린 날도 있었다 (그 샤프로 찍은 점마저로 가려지는 낮은 점수였다) 하루 종일 붙어있는 꼬리표에 이거 내점 수다!라고 표시를 한 날은 수업시간 내내 선생님보다도 크게 내 앞에서 있었다


그래도, 친구들은 나를 왕따 시키진 못했다. 공부를 못한다고 나를 따돌리기에 나는 기가 죽어있는 아이는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도 컸고 자기주장도 강했다. 공부가 아닌  여러 체험활동을 통한  자신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는 매 학기 방학 때마다 학교 공부 외 활동에 나를 적극적으로 참여시켰다. 종묘 체험 역사체험 NGO 활동 국토대장정 어학연수로 늘 바빴다 성적에 관심이 있는 친구들은 그저 쉬는 시간이었을 학교 특별활동시간이 나에겐 나 스스로 존재감을 쌓는 시간이 되었다. 공부를 잘하는 친구들의 차지였던 선도부 학생회 활동했다. 성실하게 해냈다. 선생님들은 기가 막혀했지만 못하게 하진 못했다.


나의 이런 자신감 뒤에는 늘 엄마가 있었다 엄마 아빠의 이혼으로 가족 구성원  모두가 불안한 그때를 보냈겠지만 언제나 뒤를 돌아보면 엄마가 있었다


'나는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었어. 내가 아기 인 널 사람 대하듯 하면 어른들은 애한테 뭘 그렇게 불필요한 말을 하냐며 혼났고, 미용 일을 열심히 하면 사람들은 엄마 아닌 다른 사람 손에 크는 아이를 걱정하며  집에서 아이 키워야 하는 게 아니냐며 혀를 끌끌찼고 부동산 투자를 적극적으로 하는 내게 무모하다고 했어 '


지금은 예능에서 육아를 가르쳐주기도 하고, 유튜브에서도 아주 쉽게 원하는 (듣고 싶은) 정보를 말해준다 요즘 내가 관심 있는 유튜브들을 보고 소위 전문가라고 칭해지는 사람들의 글을 보면 엄마가 언제고 한 번씩 내게 해 준 말들이었다.     


 인생의 전반의 영향을 끼친 58 개띠 엄마는 화분에 물을 주며 부모도 봉양하고 자식도 품어야 하는 불쌍한  세대라며 자조석인 웃음을 지었지만 근현대사의 중심 속에서 자라온 엄마를 자양분으로   자존감을 키울  있었던 딸은, 엄마가 무모할지언정 새로운 것에 공부할 , 당장 되지 않더라도 계속해서 관심을  ,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는 , 언제라도 내가    것이라는 가르침 속에서 다행이도 58년 개띠엄마의 딸은 단단하게 컸다


자신의 부모에게 할 수 있는 만큼의 능력으로 효를 다하고, 스스로가 두발로 서있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는  엄마를 보며 자신의 삶을 책임지는 법을 배운다


부모가 원하지 않는 말을 하는 아이 었던 나는 나를 최우선에 두고 선택한다 기준이 명확하면 흔들리더라도 제자리를 빨리 찾을 수 있다. 엄마에게 내가 일 번이 아니라는 것에 속상하지 않다 엄마의 마음에 내가 일 번이 아니라 해서 엄마가 날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니까


인생을 스스로를 설계해서  살아내는 것 보다 더 중요한것이 있을까 58년 개띠 엄마는 나에게 딱 맞는 인생의 지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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