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다고 느끼게 해 준 사람

by 길손

"엄마는 살면서 언제 가장 사랑받는다고 느꼈어?"

팔순이 되신 엄마께 여쭤봤다.


"사랑받는다고 느껴본 적?"

그런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응, 그러니까 누구한테서 사랑받는 느낌을 가장 많이 받았냐고."


엄마의 침묵.

나는 속으로 예상 답변을 상상해봤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아주 어렸을 때 돌아가셨으니 아닐테고,

외할아버지한테서는 구박을 많이 받았다고 했으니 아닐테고,

이모도 일찍 결혼해서 같이 산 기간이 짧았다고 했으니 아닐테고.

아버지는 워낙 무심한 성격인데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을 많이 시켰으니 아닐테고.

외삼촌 중의 한명일까?

아니면 자식들 중의 한 명일까?

혹시 나?


"너거 할아버지."

"응? 우리 할아버지?"

"아버님이 참 좋은 분이셨다."




젊은 시절 엄마는 예민하고 짜증많고 하여튼 피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식들 뿐 아니라, 손주들, 교회 사람들, 친구들, 이웃들까지 하나같이 엄마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나는 이 변화가 어떻게 가능해졌는지 궁금했다.


엄마가 노년에 이렇게 아름다운 어른이 된 건 그 동안 받은 사랑들이 쌓여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도 받아 본 사람이 하는 거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 중에서 엄마가 느끼기에 가장 큰 사랑을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궁금했다.




가난한 농부의 딸이었던 엄마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다. 하지만 매우 영민하고 똑부러지는 성격이었고, 10대 후반에는 대구까지 가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외할아버지와 친할아버지의 합의(?)로 결혼이 성사되면서 어쩔 수 없이 시집을 가게 되셨다.

시집이라고 간 곳은 깡촌 중의 깡촌이었다. 홀시아버지에 빚이 잔뜩 있는 집안이었고, 남편은 한 살 어렸는데 그나마 나이에 비해서도 철이 없었다.


결혼하고 한동안 아이가 생기지 않았고 이 기간 동안은 도망갈 생각을 자주 했었다.

3년 만에 첫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그 생각은 접었다. 엄마는 그 후로도 아이 넷을 더 낳았고, 농사를 하면서도 누에고치도 키우고, 옷도 직접 다 해 입으면서 부지런히 일했고 집안의 모든 빚을 다 갚았다.

귀하디 귀한 며느리였고, 할아버지는 며느리 귀한 것을 표현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호야 애미 건드리지 말고 너거 일이나 잘해라. 그래 싫은 소리 할라믄 인자 여 오지도 마라."

손윗 시누이들인 고모들이 엄마에게 잔소리라도 할라치면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호야 애미가 얼마나 헤픈지 모른다."

없는 살림에도 뭐든 많이 해서 사람들에게 나누는 모습에 마을사람들에게 흉보듯 자랑을 하셨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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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할아버지를 엄마도 정성을 다해서 모셨다.

할아버지의 사랑방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막걸리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막걸리는 엄마가 집에서 직접 빚었다.

그러다 1960년대 양곡관리법 제정으로 주류용 쌀 사용이 '식량 낭비'로 간주되면서 단속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아버지의 사랑방 손님 대접을 위해 엄마는 막걸리를 계속 만들었다.


하루는 단속반이 마을에 온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단속반은 술 냄새를 귀신같이 맡고 찾아냈기 때문에 막걸리를 빚어 놓은 집들은 비상이 걸렸다.

이때 엄마는, 들키지 않기 위해 빚은 술을 부엌에 가져와서 숨겨놓고, 일부러 젖은 나무들을 아궁이에 넣었다.

연기와 냄새가 얼마나 심했는지 엄마 조차도 숨쉬기 힘들었다.

단속반은 젖은 장작을 태우는 엄마를 보고 철딱서니 없다며 핀잔을 주고 갔다.




"호야 애미 고생 안시키고 죽어야 된다."

할아버지는 늘 그렇게 말씀하셨고, 몸이 좀 안좋다며 누운 지 사흘만에 돌아가셨다.

할아버지가 원하시던 대로 며느리 고생 안시키고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 얘기를 할 때마다 엄마의 입가에는 미소가 번졌고 눈빛은 아련해졌다.

소녀같은 엄마의 모습, 시아버지에게 사랑받는 어린 며느리의 모습이 살아오는 듯했다.

시아버지로부터 사랑받은 기억에 더해, 남편, 친구들, 자녀들까지 사랑의 기억들을 쌓았을 것이다.

그 기억들이 쌓여 엄마의 상처의 자리에 여유가 자라나고, 내가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지혜롭고, 다정하고, 자랑스러운 어른이 되신 것 같다.




누군가 나에게 누구에게서 가장 사랑받는 느낌을 받았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엄마다.

할아버지의 사랑이 엄마를 부드럽게 만들었고, 엄마의 사랑이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사랑은 그렇게 모양을 바꾸며 이어지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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