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초라했던 그때,
가장 눈부시던 우리.
이 문구보다 영화를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다.
로맨스 영화의 대부분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사랑을 완성한다.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결말이고 관객에게 기분 좋은 감정을 남기기 때문이다. 나 역시 밝고 산뜻한 엔딩의 영화를 좋아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헤어짐이 더 뜻깊게 기억되기도 한다.
이 영화가 그렇다. 10년 만에 재회한 은호와 정원은 과거 이야기를 꺼내며 당시를 회상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은호는 묻는다. "만약에 내가 그때 지하철을 탔다면 우리는 안 헤어졌을까?" 정원은 말한다. "그럼 평생 옆에 있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말을 바꾼다. "아니야. 그래도 우리는 헤어졌을 거야" 그렇게 둘은 과거의 사랑을 깨끗이 마무리 짓는다.
둘의 사랑이 얕았던 것은 아니다. 은호는 가족이 없는 정원에게 집이 되어 주었고, 정원도 묵묵히 은호의 곁을 지켰다. 다 해주고 싶었단 은호에게 정원이 다 받았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도 현실의 벽은 높았다. 취업은 어려웠고 돈은 없었으며 반지하로 이사까지 갔다. 사랑의 힘으로 잘 버티나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서서히 등을 돌리고 날선 말을 뱉었다.
사랑이 식어가는 과정이 잘 표현됐다. 정원을 향해 선풍기를 돌려주던 은호는 어느새 자기 방향으로 선풍기를 틀었고, 햇빛을 다 가지라는 말이 무색하게 방에 커튼을 쳤다. 정원이 그렇게 원했던 햇빛인데 말이다. 무엇보다 정원이 들여놓고 했던 소파는 둘이 잘 사용하다가 점차 낡아졌으며 결국에는 버려졌다. 둘의 사이를 대변하는 것처럼. 여러 장치들로 관계 변화를 암시한 덕에 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그런 면에서 세심한 영화라고 생각이 들었다.
둘은 결국 헤어지고 나서 더 잘 됐다. 결과론일 뿐이지만 어쩌면 헤어짐이 서로에게 더 좋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장기 연애라도, 진한 사랑이었대도 끝이 날 수 있구나 싶었다. 그래도 그 시절을 기억해줄 사람이 있고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람이 있다는 건 조금은 부러웠다.
흑백으로 표현되던 현재는 컬러로 바뀌면서 영화는 끝이 났다. 은호가 만든 게임 속에서 에릭이 제인을 찾지 못하면 색을 잃어버려 흑백이 된다는 것을 활용한 연출이었다. 감정을 정리하고 서로를 보내줬을 때 비로소 컬러로 변하는 장면은 아름다운 결말로 남을 것 같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인물의 감정선과 이야기를 잘 보여준 영화라 나는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