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기운

by 나미

오빠와 내가 티후아나 생활을 시작하며 살게 된 집은 아파트 정문, 현관 등등 4개의 열쇠가 있었지만, 모두 하나씩 뿐이라 늦게 집을 나서고 일찍 집에 돌아오는 내가 그 열쇠들을 지녀왔다. 그랬기에 매일 오빠는 집에 도착하면 정문 밖에서 내게 전화를 걸었고, 나는 그 길로 쪼르르 달려 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어제는 내가 상사분들과 저녁식사를 하는 특수한 상황이 있었고, 혹시 오빠가 더 일찍 귀가할까 싶어 가브리엘의 도움을 받아 집 키를 복사했었더랬다. 그렇게 오빠도 본인 열쇠를 가지게 됐다. 그리고 오늘 아침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던 오빠는 열쇠 두 세트를 모두 챙겨버리고 말았다.


티후아나에서 회사를 다니면서부터 오빠와 나는 줄곧 5시 50분 알람을 맞춰놓고 기상한다. - 물론 50분에 일어나지는 못해서 항상 잠에 취해 침대에서 하루 중 가장 고단한 15분 정도를 보내고 눈을 뜬다. - 나는 출근 시간이 오빠보다 30분 정도 늦고, 또 상사분들이 상당히 '유동적'인 사고로 크게 관여하지 않는 터라 그렇게 일찍부터 준비할 필요는 없지만, 특히나 아침잠이 많고 나보다도 힘들어할 오빠가 안쓰러워서, 또 내 마음이 개운치 않아 항상 같은 시간에 눈을 떠 머리를 쓰다듬어주곤 한다.

오늘은 유난히 일어나기 힘든 수요일 아침이었다. 다른 여느 날처럼 일어나 씻고 준비하고 있었다. 미리 불러놓은 우버는 이미 도착해서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친절히 기다려주는 우버 기사들도 있지만 최근 며칠간 나와있지 않으면 휙 가버리는 몇몇 우버 기사들에게 이골이 난 오빠와 나는 혹여나 우버 기사가 가버릴까 무척이나 서둘렀고, 그렇게 정신없던 와중 오빠는 오빠의 신상 열쇠들과 내 열쇠 모두 가져가 버리고 말았다.

내가 집을 나설 때가 되고 집안 이곳저곳을 찾아봐도 내 열쇠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싸한 기분이 들었고 다소 차가운(?) 목소리로 오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빠 혹시 열쇠 두 개 가져갔어?"

앗. 망했다. 속이 답답해졌다. 오빠는 본인이 다시 돌아와 문을 잠그고 나갈 테니 우선 먼저 출근하라고 했지만, 우버로 두 번씩이나 왔다 갔다 하는 건 나에게 있어 상당히 경제적이지 못했다. 오빠에게 가브리엘에게 부탁해서 알아서 하겠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속은 끓었지만, 밖에 가브리엘이 기다리고 있으니 빨리 여권과 돈, 중요한 문서들을 챙겨 나왔다. 그리고 가브리엘을 보자마자 한 한 마디는, 'Odio a Subin(수빈이 싫어)'이었다.

가브리엘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이유를 물었고, 나는 이유를 설명하며, 같이 출근하는 민주를 회사에 내려주고 오빠 회사에 가 열쇠를 받은 후 집에 돌아와 문을 잠그는 것을 도와줄 수 없겠냐고 부탁했고, 가브리엘은 언제나처럼 착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알겠다고 대답해주었다.

마침 오빠에게 카톡이 오고 있었는데, 심기가 매우 불편했던 나는 가브리엘이 도와준다 했으니, 회사 도착해서 연락하면 나와서 키를 달라는 말을 상당히 딱딱하게 전했다. 오빠도 '알겠어'라고 아주 간단명료하게 답장했는데, 이 카톡은 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가브리엘에게 오빠가 내 반응에 화가 난 것 같다고, 그런데 내가 어떻게 항상 사람 좋게만 오빠를 맞을 수 있겠냐고 말했는데, 그 순간 오빠에게 '오빠가 아침에 준비하느라고 정신이 없어서... 미안해'라는 카톡이 왔다. 숨이 탁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딱딱해졌던 마음은 다시 느슨해졌고, 몽글몽글해졌고, 또 폭신해졌다. 그렇게 나는 오빠의 회사로 향했다.


'오빠가 나였다면 그렇게 짜증 내지도, 차갑게 굴지도 않았을 텐데, 나는...'라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나는 오빠네 회사로 향하기 전, 사무실에 들러 작은 메모지에 사과 그림을 그린 것을 챙겼더랬다. 가브리엘의 도움으로 오빠 회사에 도착해 몇 분 정도 기다리니 오빠가 내려왔다. 피곤해 보였다. 오빠에게서 열쇠를 받아 든 내가 '앞으로 오빠 열쇠는 없어.'라고 장난스럽게 말했지만, 오빠는 여전히 지쳐 보였다. 그리고 오빠가 내게 건넨 말,

"화났어? 화내지 마, 민아야."

무언가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아직까지도 무언가 뚜렷이 밝혀내지 못한 감정을 안고 오빠에게 쪽지를 건넸다. 오빠는 있다가 열어보겠다고 했다. 오빠의 표정과 반응에 그 미묘한 감정이 더욱 나를 꾹 눌렀다. 하지만 나는 상황이 상황인 만큼, 평소처럼 그 감정을 파고들어 밝히는 것을 미루어두고 오빠에게 뽀뽀를 했다. 손을 잡았다. 포옹을 했다. 그리고 밝게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며 나는,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해서 문을 잠그고 나와 가브리엘과 회사로 향하는 길, 풍부한 햇살과 함께 기분 좋은 봄의 공기가 포근했다. 오전 시간대라 거리도 한산했는데, 마치 초중고 시절, 일찍 조퇴하고 학교를 나와 느꼈던 그 달콤한 자유가 느껴지는 듯했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기분이었던가. 사소했지만 행복했다. 평소 강한 맛을 선호하지 않는 나는 기쁨을 느낄 때에도 강렬하고 짜릿한 기쁨보다 이렇게 소소하게 맛보는 기쁨을 더 좋아한다. 그럴 때 정말 '행복'하다고 느낀달까. 마침 오빠에게 카톡이 왔고, 나는 내가 느끼고 있는 노랑빛 가득한 봄기운과 달콤한 자유에 대해 이야기했다. 감상에 젖은 내게 오빠는 빨리 차를 사서 봄을 즐기러 돌아다니자고 말했는데, 오빠의 그 한마디에 나는 급격히 도취되어 버렸고, 그럴 때마다 하는 기분 좋은 상상을 시작했다.

- 도시락 싸들고 / 사람 없는 곳으로 / 그냥 풍경이 좋은 곳으로 / 다른 사람들은 없어야 해 / 우리 둘만 / 그렇지만 꼭 필요한 한 사람이 있어 / 길거리에서 아이스크림 장사하시는 아저씨 / 딱 그 아저씨만 한 분 지나가면 퍼펙트할 거야 / 우리는 트렁크 뒷좌석에서 도시락을 까먹고 이렇게 쉬고 있는데 / 그 아저씨가 지나가는 거지 /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사서 까먹고...

이런 쪽으로 나와 합이 참 잘 맞는 오빠도 언제나처럼 이런 나의 상상에 기분 좋게 동조해주었다.

- (그때 마침 우리 앞을 지나가는 아이스크림 아저씨는) 운명이야 / 그거 아이스크림 안사면 범죄야 / 잡혀가...

오빠는 일을 하러 다시 가봐야 했지만 나는 마침 교통체증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차 안에서 하던 감상을 마저 즐기며 가브리엘과도 또 한참 수다를 떨었다. 봄기운 만연한 이 순간, 이 완벽한 시간대와 공기에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 오직 한 명과 소소한 피크닉을 떠나는 꿈을 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