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우리 아빠

by 나미

요즘 삼성에서 월요일마다 공장 가동을 쉬어서 저번 주에 이어 이번 주 월요일도 이렇게 쉬게 되었다. 아침에 오빠를 출근시키고, 조금 누워 있다가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요즘 내 취미(?)가 되어버린 한 주 요리 계획을 한참 했다. 그리고 지금, 유튜브에 가사 없는 평온한 노래를 틀어놓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다.

오빠는 일을 나가고 나 홀로 맞이하는 월요일의 쉬는 날. 저번 주에 이어 또다시 맞이하게 된 여유로운 월요일 오전, 거실 탁자에 노트북을 켜놓고 이것저것 하다가 드는 생각이 있다. 상상이 있다. 노랫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이 공간,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하는 내 옆에 그림일기를 쓰는, 색칠공부를 하는 나의 아이가 있다면 어떨까 하는.

어린 시절 내 모습이 기억난다. 엄마와 나는 그 예전의 동부아파트 우리 집 부엌, 식탁에 앉아있었다. - 우리 가족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내가 멕시코로 오기 전까지 '동부아파트'에서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사 한 번 하지 않고 살아왔다. 내 추억이 가득 묻은 공간. - 엄마는 마늘을 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그 옆에서 그림일기를 쓰거나, 색칠놀이를 하곤 했다. 색칠놀이를 하던 어느 날이었다. 난 색칠놀이 책 속 요정의 머리를 주황색 색연필로 꼼꼼히 칠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우리 엄마는

"민아도 염색 한 번 해볼래?"

라고 물었고, 그 길로 엄마는 나와 동생의 손을 붙잡고 아파트 단지 내의 미용실로 걸어갔다. 그렇게 나와 동생은 노란색 브릿지가 들어간 머리를 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염색이었다. 그때 우리 엄마는 왜 갑자기 브릿지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왜 그런 질문을 했을까.

나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엄마가 화장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항상 짧은 단발에, 등산바지, 카라 티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엄마는 다른 일반적인 엄마들과, 여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 영향이 컸는지 나 또한 25살이 된 지금까지 화장을 하고 다니지 않는다. 최근에는 오빠의 영향으로 오빠가 직접 고르고 사준 슬랙스와 재킷을 입고, 구두를 신을 때도 있지만, 그 전까지도 나는 언제나 청바지에 티셔츠라는 스타일을 고수할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막 스무 살, 성인이 될 무렵 엄마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다. 엄마는 꾸미는 쪽으로는 취미도 흥미도 없지만, 나는 좀 예쁘게 꾸미기도 했으면 좋겠다고.

내가 인생 첫 브릿지를 한 그때로 다시 돌아가 본다. 우리 엄마의 마음을 한 번 들여다본다. 검은색이 아닌 주황색으로 머리를 칠하고 있던 딸에게, 엄마는 좀 더 열린 마음을,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싶었을까. 꾸밀 줄 모르는 자신이지만, 본인의 딸은 다른 여자 아이들처럼, 혹은 그걸 넘어선 다양한 경험을 시켜주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무슨 이유에서였든 그건 딸에 대한 애정이었으리라. 사랑이었으리라. 남들이 해보는 건 다 해주고 싶은, 그보다도 더 해볼 수 있게 해주고 싶은, 본인의 테두리를 넘어서 더 많이, 더 좋게 해 주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겠지.

그보다도 어린 시절이었던 것 같다. 다른 친구들은 엄마가 바르는 매니큐어를 알록달록 손에 예쁘게도 칠하고 다녔다. 나 또한 어린 호기심에 한 번 발라보고 싶었지만, 우리 집에는 그런 매니큐어가 있을 리 없었다. 엄마는 매니큐어가 건강에 좋지 않다고 하며 사주지 않았더랬다. 어린 나는 어쩔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퇴근한 아빠의 손에는 분홍색 매니큐어와 리무버가 들려있었다. 또 어느 날은 다른 친구들처럼 파마가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파마를 시켜주지 않았다. 사실 그런 걸 잘 알지 못하는 우리 엄마 아빠였다. 그랬지만 딸의 그 바람이 눈에 밟혔던 우리 엄마 아빠는 며칠 뒤, 집 바로 옆에 있는 강원대학교 안에 미용실에 데려갔다. 파마를 시켜 주었다. '우리 딸 파마해놓으니 꼭 백설공주 같네'하고 말해주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른다.

뭐든 하고 싶은 건 해야 직성이 풀려서 이렇게 홀로 멕시코까지 온, 이기적이고 못난 딸을 참 바보 같이도 사랑해주었다. 끔찍이도 아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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