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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이 Apr 30. 2022

희망의 빛


이듬해 1997년 여름, 나는 가족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그 방문을 계기로 나는 한국의 인문과학 및 문학 서적의 외국어 번역을 지원해 줄 만한 몇몇 재단들의 문을 두드려 보았다. 그러나 거의가 부정적인 대답이나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을 뿐이었고, 단 한 군데가 내게 희망을 준 곳이 있었다. 바로 내가 직접 찾아가 보았던 문예진흥원이었다. 인문과학 서적의 번역 지원은 전례가 없기 때문에 어렵지만 얼마 전부터 문학부문 번역 지원은 매년 꾸준히 해오고 있는 터라 지원 서류를 한번 내보라고 했다. 

내게는 너무도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원받을 가능성의 확신에 대해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던 나는 나를 친절히 맞아준 문예진흥원 직원에게 나의 ‘순진한’ 근심을 피력했다. 나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을 뿐, 한국의 대학에서 근무하는 이름난 교수도 아니요 한국의 유력한 학술 집단이나 문예 집단에 소속되지도 않은 일개 무명의 평범한 개인일 뿐인데, 그래도 지원받을 가능성이 있느냐는 내 질문에 직원은 빙긋이 웃음을 지으며 그런 점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하여튼 지원 공모 기간에 신청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직원의 미소는 무엇을 의미했던 것일까? 타인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한국 사회를 그런 식으로 단순히 매도해버린 나의 순진함과 어리석음을 비웃었던 것일까? 아니면 이제 더 이상 그런 사회가 아닌, 변화와 발전을 거듭한 한국사회의 실정을 전혀 모르는 나의 무지가 너무도 어이가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아니면 한국사회에 대해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던 내 피해의식의 발로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문예진흥원을 나오면서 한가닥 희망의 빛줄기를 잡은 듯한 뿌듯한 마음을 가졌다. 내가 일찍이 경험했던 «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는 격언이 다시 생각났다. 아무리 불가능해 보이고 막막해 보이기만 하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추구하는 바를 열심히 찾기만 하면 언젠가는 그 가능성의 빛줄기가 눈에 보인다는 것은 과연 진리인 것인가? 그런 일이 내게 또다시 찾아올 수 있을까? 

그러나 열심히 찾았는데도 끝내 보이지 않더라고 반박할 사람들도 얼마나 많을 것인가. 우리나라 대기업들이 한창 잘 나갈 때 기업가들의 표어는 주로 ‘무조건 하면 된다’였다. 그러나 IMF 위기 앞에서 그들은 얼마나 쓴 맛을 보았던가. 

지금의 세계시장은 너무도 복잡 미묘한 변수들이 작용하기 때문에 노력해서 될 가능성의 확률은 점차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이제 ‘무조건 하면 된다’의 시대에서 ‘해도 되지 않을 수 있다’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부딪힐 좌절의 벽은 점점 더 많아지고 두터워져 가기만 한다. 옛날의 진리가 이제 더 이상 진리로 통하지 않는 모호하고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 해 한국 방문을 마치고 파리로 돌아온 지 약 2개월이 지난 10월 중순 경에, 문예진흥원에서 약속대로 번역지원 서류를 보내왔다. 나는 조정래 작가의 소설집을 번역작품으로 선택했고 모든 구비서류를 갖추어 서울로 보냈다. 그러나 얼마 안가 그 이름 유명한 IMF 경제 위기가 한국을 강타했다. 한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위기일발의 상황에 처해 있다는 너무도 슬픈 소식이 전해졌다. 내 마음은 몹시도 착잡했다.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할 내 한국의 가족과 동포들…… 그리고 모처럼 내 어두운 마음에 희망의 불을 밝혔던 번역지원 건도 수포로 돌아가리라 생각되었다.

해가 바뀌고 두 달째 접어들었다. 번역지원 심사결과 날짜가 훨씬 지났음에도 나는 여전히 문예진흥원으로부터 소식을 받지 못했다. 내 마음 한 구석에선 이미 포기를 했음에도 또 하나의 마음은 자꾸만 애타게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한국으로부터 걸려온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IMF의 한파로 인해 지원 건을 대폭 줄였음에도 내가 선택한 작품이 번역 지원대상으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아, 그때의 날아갈 듯이 기뻤던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있을까? 마치 온 세상을 정복이라도 한 듯이 뿌듯하고 흐뭇했던 마음.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두렵고 무서울 게 없을 것만 같이 저절로 힘이 솟구치고 용기가 났다. 절망의 낭떠러지에서 허덕였던 만큼 그 기쁨은 배가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한국문학 번역의 길에 첫 발을 내디뎠다. 비록 내 전공은 아니었지만, 내가 그토록 원했던 길이었기에 나는 사명감을 가지고 첫 번역 작업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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