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한국을 프랑스에 알리는데 기여하고자 하는 뜻을 가슴에 품은 채 나는 다방면의 정보를 캐기 위해 이리저리 분주히 쫓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한 한인 동포신문에서 나의 마음을 사로잡는 광고를 발견하게 되었다. 대산문화재단이 한국문학 작품의 외국어 번역지원을 공모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는 학위논문으로 인해 그간 밀쳐두었던 한국 인문과학 서적들이나 문학작품들을 닥치는 대로 읽고 있는 중이었고, 이들을 프랑스에 한번 소개해 봤으면 하는 막연한 소망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 당시의 내겐 도무지 출구가 보이지 않는 너무도 막막하기만 한 길이었다. 그런 내게 그 광고는 캄캄한 동굴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한줄기 희망의 빛줄기와도 같은 것이었고, 나는 한번 도전해보고 싶었다.
그러던 중, 나는 어떤 지인을 통해 프랑스의 한 젊은 작가를 내 공동번역자로 구할 수가 있었고, 내가 오래전부터 번역해보고 싶어 했던 황석영 작가의 작품을 선정해서 샘플을 번역하고 모든 구비서류를 갖추어 마감 날짜에 맞추어 서울로 보냈다. 그리고 약 석 달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불안한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왠지 나는 거기에 커다란 희망과 기대를 걸고 있었다. 원래 아무것도 모르면 용기가 백배해진다고 하듯이, 당시의 나는 그랬던 것 같다. 그 방면에 있어 나보다 훨씬 더 유력한 응모자들이 많을 것이라는 점이나 이제 곧 첫 발을 내디딘 애송이 초보자인 내 번역 능력의 한계 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나는 무턱대고 분명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토록 컸던 기대와 희망은 곧 좌절의 폭풍이 되어 내 마음을 후려쳤다. 더구나 당시에 내가 시도하던 한불 교류 사업들도 별로 신통치 않았고 독서와 책을 좋아하는 내게 이 번역의 길이야 말로 바로 내가 진정 가고 싶어 하던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이라 그 충격과 패배감은 더더욱 크게 다가왔다. 낙선을 통보받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내 번역능력에 대해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내 능력이 모자란다면 이 번역의 길을 아예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제 이 길마저 그만두면 또 어떤 길을 찾아 헤매야 한단 말인가?
또 한편으로 들려오는 말들에 의하면, 현직에 있는 유명한 교수의 이름이나 유력한 집단의 이름으로 응모를 해야지 힘없고 알려지지 않은 일반 개인의 이름으로는 지원받기가 하늘에 별따기 보다도 힘들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실제로 어떤 이들은 이름난 교수의 이름을 빌려 그와 공역인 것처럼 서류를 꾸며 제출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단순히 내 능력만의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힘없고 아무런 인맥도 없는 내가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어렵지 않은가? 나는 수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처럼 찾은, 내가 열정을 바쳐 할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든 그 길을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