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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도둑이 되었다.

찬란한 빛도 순간의 어둠으로 물들

by 서리가내린밤




2030년 지구는 온난화의 심각성을 맞이해 각 나라에 피해를 발생시켰다. 땅에는 가뭄이 들어 곡식이나 열매를 얻는 것이 어려워졌고, 바다에는 지금까지 보지 못한 생물들이 죽어서 물 위로 떠올랐으며, 사계절은 사라지고, 뜨거운 여름만 존재하게 되어 북극에 있는 빙하는 다 녹아 물이 되고, 북극곰들은 멸종이 되는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 각 나라의 정부들은 지구 온난화의 심각성으로 사람들이 먹고, 생활하는데 어려움을 겪게 되자 그제야 무리하게 큰 대책들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각 나라의 정부 모두가 합의하고, 지구를 살리기 위해 내놓은 대책들은 이러했다. 첫 번째, 가장 필요한 화학제품 외에 모든 화학제품, 플라스틱, 비닐 등을 만드는 회사들을 중단할 것. 두 번째, 휘발유, 경유로 사용하는 자동차들을 중단하고, 전기 자동차를 이용할 것. 세 번째, 전기 자동차는 한 집에 최대 한 대만 사용하고, 버스, 택시, 전동 자전거, 전동 킥보드를 최대한 이용할 것. 네 번째, 나무를 많이 심을 것.

2038년 각 나라에서는 8년 동안 이를 어기지 않고 지켰다. 그러나 북극이 다시 얼게 되는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지구의 온난화로 각 나라와 사람들의 삶은 8년의 시간 동안 확연히 달라진 것을 볼 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더 이상 바다에서는 사람들이 볼 수 없었던 미생물들을 물 위에서 만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기름으로 먹고살던 중동 지방은 어느새 전기를 이용한 자동차와 자전거, 킥보드의 발전으로 밀려나게 되면서 이를 통해 부를 얻게 된 미국과 대한민국의 힘을 받게 되는 일이 생겼다.


평소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오후. 맑은 하늘에 뜨겁게 인사를 건네던 해, 하굣길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던 들풀, 전기를 먹고 달리는 차들까지 평범하고도 익숙한 것들 투성인 그런 오후에 수림은 그 속에서 혼자만 달라진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마른하늘을 올려다 보아도 뜨거운 비가 자신의 얼굴을 계속 적실 때, 또 다른 자신이 말을 걸어왔을 뿐인데 그 말의 씨앗이 큰 파도를 일으켜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 때, 수림은 알았다. 자신이 달라졌다는 사실을…


오늘날에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출퇴근길, 등, 하굣길을 개인 전동 자전거와 개인 전동 킥보드를 타고 이동했다. 수림이 다니는 학교에도 전동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를 이용하는 아이들이 많아서 오히려 이용하지 않는 아이들의 수를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였다. 수림의 바람은 전동 킥보드를 타고 다니는 아이들의 수에 속하는 것이었다.

왜 지금까지 전동 자전거나 전동 킥보드를 이용하지 못했냐고 묻는다면, 가부장적인 집안에서 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던 탓에 제대로 전동 킥보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낼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림이 전동 킥보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려던 때면 아버지가 눈치를 챈 것인지 먼저 성적이야기를 꺼내거나, 자리를 피하거나, 엄마와 싸우거나, 늦게 들어오는 일들이 생기곤 했다. 수림은 한동안 아버지께 킥보드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포기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개인 이동수단이 없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들 무리에서도 친구들과 나누던 대화 중에도 점점 소외되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포기하다시피 하던 수림은 가족들 모두가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로 이동하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전동 킥보드 한 대만 사주세요.”


수림은 그 순간 학교에서 배웠던 육하원칙을 사용하여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부모님이 보시기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구나’하고 의심하지 않도록, ‘우리 딸이 참 똑똑하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도록 어필하면서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아버지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공부 어필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판단했다.


“등하굣길과 출퇴근길에 전동 킥보드와 전동 자전거를 이용하지 않는 사람의 수를 세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편리하게 이용하고 있어요. 그들은 왜 대중교통이 아닌 전동 킥보드와 전동 자전거를 이용하고 있는 걸까요? 공부할 시간도 절약하고, 교통비도 절약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수림은 아버지가 출퇴근 길에 자기 편차를 이용하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저렴하다는 것도, 앞으로의 비용을 생각했을 때 전동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가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빼먹지 않고 열변을 토해냈다. 수림은 할 말을 다 마친 후에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꼈다. 아버지 앞에서 자신이 이렇게까지 논리적이고, 조리 있게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 새롭게 느껴지기도 했다. 또 스스로를 칭찬하며 완벽하게 설득했다고 믿고 자기 확신과 자기만족에 차서 긍정의 답변이 돌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몇 분도 채 가지 못하고 그건 착각에 불과한 일이었다는 현실을 마주하게 되었다. 수림은 여태껏 아버지가 공부를 중요시 여기는 분이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돌아온 생각지도 못한 답변은 딱 하나, 안전이었다.


“전동 킥보드 타다가 학생 여러 명 차에 치여 죽었다더라. 나는 너 빨리 잃어버리기 싫다.”


예상 밖의 대답이었다. 수림은 그동안 어떻게 전할까, 고민하던 중에도 아버지가 안전을 중요하게 생각할 줄은 전혀 생각지 않았다. 아니, 못했는 줄도 모르겠다.

그동안 아파서 조퇴하고 싶다고, 열이 펄펄 나서 학교에 못 가겠다고 할 때마다 아버지에게 돌아오는 대답은 죽어도 학교에 가서 죽으라는 냉정하고, 차가운 말이었다. 그래서 안전 때문에 전동 킥보드를 사주지 못한다는 아버지의 대답은 전혀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닌 사주기 싫어서 적당한 핑계를 골라 피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아버지의 말에 처음으로 반기를 들어 다시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또 그럴 수 있는 용기는 사라졌다. 아버지는 더 이상 전동 킥보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는 듯 헛기침을 하며 TV뉴스를 틀어 시선을 돌렸다. 수림은 그날 모순적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영원히 잊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다음날에도 여전히 학교에서는 킥보드에 관한 대화가이어 졌다. 주로 아이들의 대화는 매일 똑같았다. 이 브랜드의 킥보드가 더 좋은 것 같더라, 너는 어느 정도의 값을 주고 샀냐, 학교 끝나고 킥보드로 시합해서 음료수 내기 게임 하는 것은 어떠냐, 학교 끝나고 집에 갈 때같이 가자, 내일 등교 같이 하자 등 별 것 아닌 내용의 말들 뿐임에도 수림은 참여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것 만이 다가 아니었다. 대다수의 학생들이 전동 자전거와 전동 킥보드를 이용하게 되면서 학교 선생님들도 늘 안전에 대한 이야기를 빼먹지 않고 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들의 걱정은 어느새 잔소리가 되었고, 아이들은 지루해하거나 성의 없는 대답으로 반응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 학교에 선생, 학생 할 것 없이 예외적인 반응을 보이는 인물이 있었다.

수림의 담임이자 기림고등학교에서 ‘날개 없는 천사’, ‘미소치유사’등의 수식어로 불리는 2학년 3반 홍수아 선생님. 그녀가 다른 선생님들과 매일 똑같은 말을 하더라도 아이들은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차분한 긴 생머리에 인형 같은 이목구비, 가녀린 몸은 보호해주고 싶은 욕구를 일으키고, 그리 높지 않은 목소리 톤은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한마디로 연예인 할 사람이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림은 다른 친구들과 달리 담임 홍수아를 봐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수림은 담임 홍수아가 음침하게 뒤에서 이중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담임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친구들은 헬멧을 챙겨서 반 안을 뛰쳐나갔다. 수림은 그런 친구들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다가, 문득 하루 종일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들이 마냥 신이 나서 주인에게 뛰쳐나가는 것 같아 보였다.

매 수업이 끝나고 저들이 흥분하면서 뛰쳐나가는 걸 수림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같은 반 친구 호정이가 자신의 전동 킥보드를 한 번 타보겠냐고 먼저 제안하며 빌려준 적이 있었다.

그때 짧게나마 전동 킥보드에 대한 이용방법과 아이들이 킥보드에 왜 그렇게 열광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이해와 상관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우울해지는 감정은 어쩔 수 없었다.

뒤늦게 반을 나서려던 그때, 수림을 불러 세우는 목소리가 있었다. 수림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무슨 일 때문인지 어색한 표정으로 수림을 쳐다보고 있는 반장이 서 있었다.

평소에 수림과 교류가 전혀 없었던 반장이었기에 수림은 의아해하며 반장이 말을 할 때까지 기다렸다.


“백수림. 너 킥보드 없지?”


반장이 꺼낸 한마디는 수림에게 비수로 날아와 꽂혔다. 계속 주저하던 말이 킥보드 없냐는 말이라니.

수림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장은 수림의 작은 고갯짓도 놓치지 않고 보다가 이내 활짝 웃으며 수림의 손에 설문지를 건넸다.


“그럴 줄 알았어. 잘됐다. 그럼 네가 나 대신 이것 좀 작성해 줘.”


반장의 태도의 순간 수림의 인상은 찌푸려졌다. 반장은전혀 개의치 않은 듯 말했다.


“기한은 바로 내일까지. 감사.”


수림은 그 자리에서 건네받은 설문지에 대해 작성해 주겠다는 말도, 어떠한 반응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반장은 수림의 동의를 제대로 구하지도 않고, 떠맡기고 사라져 버렸다. 수림은 한동안 반장이 떠난 곳을 바라보며 황당한 채 서 있었다. 수림은 한 학기가 다 지나서야 반장이 어떤 아이인지 알게 되었다. 반장이 건네고 간 설문지에는 어이없는 질문들이 요구되고 있었다. 수림은 질문들을 볼 때마다 헛웃음을 터트렸다. 수림에게 가장이해되지 않았던 질문은 이용수단을 왜 타고 다니지 않느냐는 부분이었다. 수림은 단전에서부터 끌어 올라오는 반항심으로 어느새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학교를 빠져나왔을 때에는 벌써 노을이 지고 있었다. 때마침 엄마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져서 전화한 듯했다. 수림은 괜히 엄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지 않고, 전화기의 전원을 껐다. 엄마가 잘못한 것은 없었다. 수림, 자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시각 자신에게 전화를 걸었던 엄마가 그들 대신에 희생양이 되었을 뿐이라고, 엄마는 자신의 심리적 변화를 이해해 줄 것이라는 잘못된 착각을 했다.


학교에서 수림의 집까지는 버스를 타면 10분, 걸어가면 40분이 걸렸다. 수림은 40분이 걸리는 거리를 걸어가기로 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또 다른 반항이라고 믿었다. 수림은 자신의 반항으로 얻고자 하는 목표가 있었다. 늦게까지 전화를 받지 않는 딸이 걱정되어 애태우던 엄마가 아버지에게 딸이 갖고 싶어 했던 전동 킥보드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고, 엄마의 말을 듣던 아버지는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는 허황된 해피엔딩 이야기. 수림은 철없는 생각을 하며 캄캄한 그 길을 끝끝내 걸어갔다. 아파트 앞에 도착해서도 수림은 집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파트 놀이터 그네에 몸을 맡기고 한참을 앉아있었다. 언제 집으로 들어가야 하는지 타이밍을 보고 있을 그 찰나에 수림의 시선은 덩그러니 놓인 킥보드 한대에 닿았다. 수림이 발견한 전동 킥보드는 분리수거장 쓰레기 덤이 옆에 세워져 있었다.

누군가 정말 멀쩡한 킥보드를 버린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분리수거를 하다가 잠시 세워 둔 것은 아닌지, 수림은 머리를 굴리며 멀쩡한 킥보드 주변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그러나 눈을 씻고 찾아봐도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이 조용하고, 깨끗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겁이 많은 수림은 주인이 잠시 두고 갔을 수도 있다는 가정을 하고 한 시간을 더 기다리기로 했다. 두 시간이 지났을까. 킥보드를 찾으러 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수림은 생각했다.

고장 난 곳 없이 멀쩡한 킥보드가 버려져 있는 이유는 혹시 마음 약한 신이 반항하지 않던 애가 킥보드 때문에 반항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고 있다가 불쌍해서 “그래, 옛다.”하고 건넨 선물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물 밀듯 밀려온 수림은 킥보드를 가지고 곧바로 집으로 올라갔다. 안전하게 킥보드를 집 안에 둘 생각을 하고 올라온 수림은 현관문 앞에 서자마자 처음 본 킥보드를 보고 다시 제자리에 갖다 놓으라고 호통 칠 아버지의 모습이 그려졌다. 다시 머리를 굴리다가 수림은 위층으로 올라가는 비상계단 중간에 킥보드를 세워 두었다.


다음날 아침. 수림은 킥보드를 타고 등교할 생각에 설렜는지 처음으로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을 뜨고 빠르게 움직였다. 수림의 낯선 광경의 엄마는 불안함을 숨기지 못했다. 평소 매일 아침은 수림과 엄마의 전쟁이었다. 수림의 알람 소리가 온 집안에 도배가 되어 엄마가 꼭 깨우러 수림의 방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또 깨우면 얼마나 예민한지 온갖 짜증을 다 내고, 서로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이 다반이었다. 그랬던 수림이었기에 엄마는 낯선 수림의 모습을 보며 의심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수림은 누가 웃기지도 않았는데 웃었고, 평소 듣기 싫다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네, 알겠어요.”답하며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혼자 실실 웃었다. 학교에서도 수림의 행동은 낯설었다.

그동안 수림은 킥보드가 없어서 친구들의 대화와 무리에 낄 수 없다고 우울해했었다. 친구들 앞에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친구들의 대화와 무리에 속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기도 했다. 수림이 하루 종일 학교에서 친구들의 무리와 대화에 끼지 않자 오히려 친구들이 수림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수림은 자기 세계의 빠져 킥보드가 생긴 기쁨을 홀로 즐기고 있었다. 누군가 수림의 책상 밑에서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수림의 발을 들여다보았다면 신이 난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날 학교에서는 또 다른 이슈가 있었다.

수림이 킥보드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담임 홍수아 선생님이 결근하셨다는 것이었다. 학교 안에서는 홍수아 선생님의 결근한 이야기로 떠들썩했지만 수림만 몰랐다. 수림은 그저 학교가 빨리 끝나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종례만을 남겨두고 반장이 어제 수림에게 건네었던 설문지를 받으러 찾아왔다.


“백수림. 설문지 다 썼어?”

“어.. 하긴 했는데.”

“됐어. 중요한 건 아니니까. 선생님 오시면 네가 썼다고 할 게.”


반장의 태도에 수림은 또다시 인상이 찌푸려졌다. 하루 종일 킥보드 때문에 좋았던 감정들이 싹 사라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감정을 망쳐버린 반장에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던 수림은 또 훽 가버리려던 반장을 불러 세워 말했다.


“넌 정중히 부탁할 줄 모르니? 고마워할 줄 모르니?”

“뭐?”

“고맙다는 말이 먼저야. 그 설문지 내가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고!”


친구들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던 수림이었다. 반에서도 늘 조용하던 아이였는데 반 친구들이 다 있는 자리에서 반장에게 옳은 소리를 내뱉은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수림과 반장에게 집중되었다. 그 순간 반장의 얼굴은 후끈 달아올랐다. 수림의 예상치도 못한 말에 당황한 듯 보였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반장은 수림에게 정중히 사과와 감사를 전했다. 수림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은 수림을 다시 본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반장에게 원하던 것은 얻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도 생겨서 수림도 적잖이 당황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반장에게 너무 몰아세운 것은 아닌지 뒤늦은 후회를 하기도 했다.

수림은 담임 홍수아가 결근 한 사실을 반장이 종례를 하면서 알게 됐다. 그래도 수림에게는 관심 있는 이슈 거리가 아니었다. 반장이 종례를 짧게 마치자마자 수림은 곧바로 반에서 뛰쳐나갔다. 4층에서 뛰어내려 가던 수림은 자신의 앞에 친구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그제야 자신에게도 킥보드가 생긴 것을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었다. 수림이 달려가는 뒷모습은 신이 잔뜩 묻어 있는 영락없는 아이였다.

아무도 그녀를 고등학생 2학년으로 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수림은 그동안 하고 싶었던 킥보드 타기를 원 없이 누렸다. 삼일 동안 친구들과 킥보드 시합으로 음료수 내기도 하는가 하면, 함께 등, 하교도 하고, 등하굣길에 타는 시간이 짧다고 동네 몇 바퀴를 더 돌고서야 집에 들어가기도 했다.

삼일 뒤 학교에는 친구들이 기다렸던 담임 홍수아가 돌아왔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미소치유사’ 수식어와 맞지 않게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모두가 담임에 대해 걱정하며 궁금해할 때 수림은 담임 홍수아가 돌아온 날부터 며칠 째 계속 학교에서 사라졌다가 다음날 학교에서 발견되는 킥보드 미스터리에 대해 골머리를 앓았다. 학교 등교를 하며 수림은 다짐했다. 기필코 학교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학교에서 발견되는 이유를 밝혀내겠다고. 킥보드에 메모지도 붙였다.


“킥보드 주인 2학년 3반 백수림. 건들지 마시오.”


종례가 끝나고 담임 홍수아는 수림을 교무실로 불렀다. 수림은 킥보드를 또 잃어버릴까 걱정이 되었지만 담임의 부름에 교무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담임 홍수아가 부른 이유는 수림이 이전에 썼었던 설문지 때문이었다. 담임 홍수아는 이동수단을 이용하지 않는 학생들의 이름이 적힌 명단을 건네며 싸인을 요청했다. 명단을 받은 수림은 고민을 하다가 담임에게 말했다. 설문지를 작성한 이후에 킥보드가 생겼다고.


“그래? 그럼 명단에서 이름 빼줄게. 그만 가봐도 돼.


담임의 수월한 대처 덕분에 빠르게 교무실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킥보드 보관소에 가까워질 때마다 킥보드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수림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보다 늦게 나오는 학생이 있는지. 그때 담임 홍수아가 킥보드 보관소와 가까워지는 것이 보였다. 수림은 자신이 붙인 메모지를 떼려고 했다. 어느새 가까이 온 담임이 먼저 그 메모지를 떼어 손에 들고 있었다. 담임의 표정은 점점 후끈 달아오르고 있었다. 차가워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수림아. 아까 말한 네 킥보드니?”

“네..”

“이거 네가 산 거니?”

“아니요..”

“그럼.”


수림은 담임 홍수아의 이중적인 모습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무서울 줄도 자신이 보게 될 줄도 몰라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담임은 수림의 킥보드 손잡이 가운데를 가리켰다.

수림은 눈치를 보며 담임이 가리킨 손잡이 가운데를 쳐다보았다. 담임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글씨로 스펠링이 새겨 있었다.


“H.S.A.”


홍수아 담임의 이름이었다. 수림은 당황했다. 지금껏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흥분한 나머지 입을 열어 속사포로 그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저는 분명 버려진 킥보드를 주웠어요. 분리수거장 쓰레기 덤이 옆에 버려져 있었고, 혹시나 하고 두 시간이나 기다렸는데도 아무도 찾으러 오는 사람 없길래 가져갔던 거예요.”

“수림이 너 호현동 기림아파트에 사니?”

“네..”

“그래. 그날 내가 너무 급해서 보관소나 집에 두지 못하고, 분리수거장 앞에 버려두고 간 건 내 잘못이야. 그래도 누군가 잃어버린 걸 수도 있으니까 다음부터는 가져가면 안 돼. 알겠니?”

“네.. 죄송합니다.”

“아, 그리고 내일 다시 교무실로 와서 명단에 사인하도록.”


수림은 담임 홍수아에게 따지고 싶은 말이 많았다. 그날 그곳에 계속 방치되어 있었으면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가져갔거나, 아니면 쓰레기 차에 버려졌을 거라고. 그나마 내가 가져가서 킥보드를 찾은 거라고. 그러니 나한테 그런 훈계를 하는 게 아니라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 거라고. 실망시켜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해야 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그때 담임 홍수아의 얼굴은 ‘날개 없는 천사’도 ‘미소치유사’도 아니었다. 빨개진 얼굴, 차가운 표정,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그 앙 다문 입술까지 지금껏 보았던 담임의 얼굴은 찾아볼 수도 없이 낯설고, 이중적인 얼굴을 한 모습뿐이었다.

그날 이후로 담임이 수림을 지독히도 괴롭게 따라다닐 거라는 사실을 수림은 미처 알지 못했다.


며칠 후 수림은 복도에서 우연히 담임의 아버지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돌아가셔서 담임이 삼일 동안 결근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유를 듣게 되었다. 수림은 담임이 그날 왜 분리수거장에 킥보드를 방치하고 갔는지 그 소식을 통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안다고 하더라도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그날 하필 체육시간에 머리가 아파서 보건실에 누워있었다. 내가 보건실로 향할 때, 반에서 늦게 내려온 친구를 나는 보았다. 사건은 체육시간 이후에 일어났다. 한 친구의 가방에서 지갑이 사라졌다는 것. 범인을 찾기 위해 담임은 종례시간 학생 모두 눈을 감으라고 했다.


“혹시 누가 버린 줄 알고 가져간 사람이 있다면, 버린 게 아니라니까 교무실로 가져오세요.”


담임이 뱉은 그 문장은 정확히 수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 순간에 수림은 자신이 범인도 아닌데 범인이 된 것 마냥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모두가 다 눈을 감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홀로만 눈을 감고 모두가 자신을 속이고 조롱을 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감정도 들었다. 담임의 행동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담임은 수림을 지목하며 지독하게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녔다.

며칠 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아파트 킥보드 보관소에 누군가 불을 지르고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다.

동네 사람들은 소방차가 오기 전에 집에 있는 소화기를 하나씩 들고 나와 불을 제압했다. 밤늦게 집으로 귀가하던 수림은 불이 난 광경을 보며 누가 저런 못된 짓을 했을까 하고 혀를 찼었다.

다음날 엘리베이터 안에 새로운 안내문 종이가 붙었다.


“지난밤, 여성으로 보이는 사람이 킥보드 보관소에 기름을 뿌리고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을 아파트 외부 CCTV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경찰은 범인을 찾고 있으나 어두워서 얼굴 인식을 정확하게 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킥보드를 갖지 못한 반항심에 불러온 화가 범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수한다면 용서해 주겠습니다. 끝내 자수하지 않는다면 꼭 찾아내어 방화죄로 기소할 것입니다.”


수림은 안내문에 적힌 내용을 보고 너무 노골적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었다.

이것도 분명 담임 홍수아가 쓴 글임이 틀림없었다. 수림은 일방적인 담임의 행동으로 단전에서부터 화가 끌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때 문득 자신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그날에 담임 표정을 생각했다. 빨개진 얼굴, 차가운 표정, 할 말은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그 앙 다문 입술. 그건 내게 건넨 경고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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