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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사진

해수님의 마지막 길

by 서리가내린밤
출처 : pinterest

이미지와 내용은 관계가 없음을 알려드립니다.

스토리는 작가의 개인적인 창작물입니다.






장터는 인파로 북적였다.

검은 양장을 입은 사내가 저 멀리서 빠른 걸음으로

걸어와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 숨었다.

그는 모자와 겉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을 쫓아오던

일본 순사들의 동태를 살폈다.

순사들은 사내를 찾으려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을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

하지만 사내가 긴장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동안, 사람들의 시선은 순사들의 총이 아닌 다른 곳으로

쏠려 있었다.

서양에서 건너온 신문물, 카메라 때문이었다.

순간적으로 늘어난 구경꾼들 덕분에 순사들은

점점 뒤로 밀려났고,

결국 무리를 헤치지 못한 채 사라졌다.

사내는 한숨을 돌리며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몰려든 사람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이십여 분 동안 씨름한 끝에 그는 겨우 군중을

빠져나왔다.


그를 기다리던 이는 해수의 오른팔인 세주였다.

세주는 해수를 보자마자 조용한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해수님, 한참을 찾았습니다.

잡혀가신 줄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다들 무사한가? 그리고 그 물건은 잘 숨겨 놨겠지?”


“네, 안전한 곳에 숨겨 두었습니다.

그리고 해수님 말씀대로 강태무 그 자가

밀정이 맞습니다.”


강태무는 이들의 비밀 거처와 계획을 일본 측에

팔아넘기려 한 자였다.

리더 최윤을 감옥에서 구출하고

일본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폭탄을 들여오던 과정에서 그의 배신으로 계획이 위험에 빠질 뻔했다.

하지만 해수는 미리 그의 움직임을 눈치채고 거처를

옮기며 계획을 수정해 피해를 최소화했다.


“해수님, 조심하셔야 합니다.

해수님의 얼굴이 그려진 지명 수배 전단이

경성 곳곳에 붙어 있습니다.”


“세주, 너는 동지들에게 돌아가

그들의 안전을 확인하라.”


“해수님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세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물었지만,

해수는 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세주는 재빨리 그의 뒤를 쫓았으나

해수는 이내 어딘가로 사라지고 말았다.


며칠 뒤, 캄캄한 방 안.

촛불 하나가 희미하게 깜빡이고 있었다.

검은 양장을 입은 해수는 폭탄 두 개를 가방에 챙겼다.

하나는 계획용, 다른 하나는 자폭용이었다.

그는 깊은 밤의 고요 속에서 형무소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길가에 불이 환히 켜진 사진관이 눈에 들어왔다.


해수는 사진관 안으로 들어가

조용히 사진 한 장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기억으로 남길 게 필요하다고 짧게 말한

그의 표정은 결의에 차 있었다.


사진을 찍은 해수는 형무소 정문 앞 건물로 향했다.

형무소는 밤이라 경비가 느슨해 보였다.

그는 계획용 폭탄을 정문 근처로 던졌으나,

예상대로 폭발하지 않았다.

초조해진 그는 자폭용 폭탄을 쓸지 망설였다.

그때, 순사가 정문 앞에 떨어진 깡통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깡통을 발로 건드리자마자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형무소 정문은 무너지고, 주변은 혼란에 휩싸였다.


해수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형무소 후문으로 진입했다.

안은 아수라장이었다.

울부짖는 소리가 가득한 혼란 속에서

해수는 최윤을 찾았다.

하지만 그가 발견한 건

이미 고문으로 사망한 최윤의 시신이었다.

해수는 무너지는 형무소 안에서 고개를 숙였다.

손에 쥔 자폭용 폭탄과 최윤의 시신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는 혼란과 좌절에 빠졌다.


“세주야... 미안하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겠구나.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다.”


한 달 뒤, 세주는 장터를 지나다 사진관 앞에 걸린

익숙한 얼굴의 사진을 보고 발길을 멈췄다.


“이 사람 아시는 분인가요?

한참을 찾아도 찾아가질 않아서 여기 걸어뒀습니다.”


사진관 주인의 말에 세주는 조용히 사진을 받아들었다.

사진 속 해수는 결의에 찬 모습이었다.

세주는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날, 형무소 안에서 들린

또 한 번의 폭발음을 떠올리며

세주는 해수의 선택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진 속 그의 마지막 모습은

해수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인생사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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