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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힌자들

간절함조차 댓가가 따르는...

by 서리가내린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당신에게 소중했던 시간을

커피 한 잔으로 선물합니다.’


검은 상복 차림의 세영은 건물 앞에 멈춰 섰다.

낡은 스탠드 간판에 쓰인 문구가 눈에 띄었다.
망설임 끝에 문을 열고 들어간 카페는 외관과 달리 클래식한 분위기로 가득 차 있었다.

손님은 한 명도 없었고, 공간에는 은은한 커피 향만 가득했다.


“어서 오세요.”


바 테이블 뒤에서 나온 남자가 조용히 말을 걸었다.


“돌아가고 싶은 시간을 말씀해 주세요.”


세영은 숨을 고르며 물었다.


“정말… 과거로 돌아갈 수 있나요? 어떻게요?

아니에요, 방법은 중요하지 않아요.

정말 돌아갈 수만 있다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남자는 말없이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드립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녀의 눈길은 벽에 걸린 사진들로 향했다.


“저 사진들은 뭐예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이죠. 여기 오기 전,

그들도 세영 씨처럼 간절했어요.

세상엔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습니다.

사실 이곳은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에요.

세영 씨처럼 간절한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이죠.”


세영은 그의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커피 잔을 건네며 말했다.


“이 커피를 마시면, 세영 씨는 원하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가가 있습니다.”


“대가요?”


“돌아간 시간 속에서 세영 씨는 주변 사람들에게

잊히게 됩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죽은 가족들에게도요.”


순간, 세영의 표정이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에요?”


“말 그대로입니다.

과거 속 당신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돌아간 시간 속에서 그 누구도 세영 씨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세영은 잠시 망설였지만, 눈물 맺힌 눈동자에는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괜찮아요. 잠깐이라도… 가족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때로 가고 싶으신가요?”


“1년 전, 수능 본 날 저녁 7시요.”


세영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눈앞이 흐려졌다가

다시 떠졌을 때는 1년 전이었다.
밝게 웃으며 저녁 식탁에 앉아 있는 가족들.

세영은 참을 수 없어 부모님과 언니를

와락 끌어안았다.


“엄마, 아빠… 보고 싶었어요.

그동안 정말 미안해요. 사랑해요.”


뜬금없는 세영의 행동에 가족들은 놀랐지만,

금세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세영이, 오늘 수능 치느라 많이 힘들었구나.

괜찮아. 수고했어.”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세영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자신이 말해도 가족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식탁에서 웃고 떠드는 부모님과 언니의 모습은

점점 더 희미해졌다.


“엄마…?”


손을 내밀었지만,

그녀의 손이 공기를 허공에 휘저을 뿐이었다.
순간,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이들에게 잊혀졌다.’


가족들의 마지막 모습을 붙잡으려 소리쳤지만,

눈앞의 모든 게 어두워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원래의 방 안에 혼자였다.

세영은 허겁지겁 카페로 달려갔지만,

그곳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한편, 사라진 카페 안.
남자는 새로 걸린 세영의 사진을 보며 중얼거렸다.


“대가를 받아들이는 자만이 선택을 가질 수 있죠.”


그때,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손님이 들어왔다.

“어제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그의 목소리엔 세영과 닮은 간절함이 서려 있었다.

남자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원두를 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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