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인은 정신을 차려보니 길게 늘어선 줄에 서 있었다.
손등에는 붉게 찍힌 ‘대기’라는 글자가 선명했다.
주변을 둘러봐도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었다.
어렴풋이 기억나는 건
끝없는 어둠 속에서 깨어났다는 것뿐이었다.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은 운이 좋네요.
나는 이 줄에 서기까지 삼일이 걸렸는데.”
제인은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여기가 어디인가요?”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아직 모르겠군요.
여기는 심판 받으러 가는 길이자,
유리바다를 건너는 곳이에요.
들리는 말로는 그 바다를 건너는 동안
당신의 모든 과거가 드러난다고 하더군요.”
제인의 차례가 빠르게 다가왔다.
그곳은 찢어지거나 갈라지지 않는,
완전한 형태의 고요함이었다.
그녀는 떨리는 발걸음으로
투명한 유리바다에 발을 디뎠다.
발끝이 차갑게 시릴 만큼 투명하고 단단한 바다 위에서
그녀의 삶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유리바다의 반짝임은
그녀의 기억 속 고통을 감추지 않았다.
제인의 꿈은 단 하나, 내 집 마련이었다.
강원도 시골에서 혼자 서울로 상경한 그녀는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겠다며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에 성공한 후에도
현실은 냉혹했다.
빠져나가는 돈이 모으는 돈보다 많았다.
“더 아끼면 되겠지.”
결국 제인은 잠을 줄이고
새벽까지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깡마른 몸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동료들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많이 먹어. 보는 내가 더 힘들다니까.”
“너는 살 좀 찌워야 돼.
그렇게 비리비리해서 어떻게 버틸래.”
그들의 잔소리 섞인 말에도
제인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들이 걱정해주는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넘겼다.
그런 것은 별 타격이 오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문제는 따로 있었다.
차장이 제일 문제였다.
그는 업무 핑계로 그녀를 회의실로 불러내곤 했다.
처음에는 자료를 봐주겠다더니
점점 노골적으로 접근했다.
손길이 어깨를 지나 허벅지를 스칠 때,
제인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이제 그만하세요! 차장님을 신고하겠습니다!”
그는 비웃었다.
“너도 지금까지 즐긴 거 아니야?
왜 이제와서 깨끗한 척이야.”
“....”
제인은 말문이 막혔다. 이런 문제를 누가 즐기는지.
“불편하면, 조용히 사표 쓰고 나가.”
제인은 어차피 그만 두려던 회사였다.
차장의 얼굴에 속시원하게 사표를 내던지고 나왔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집을 계약한 날이었다.
오랜 꿈을 이룬 기쁨에, 그녀는 작은 파티를 열었다.
케이크 한 조각과 사이다 한 병.
“내 집 마련, 성공.”
내 집 하나 마련하는데 13년이 걸렸다.
오랜 시간이었다.
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누군가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다.
“누구세요?”
제인의 물음에 남자는 당황하며
부동산 중개인을 불러왔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그녀는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었다.
월세 계약도 해지한 상태였다.
의지할 곳도 없었다.
끝내 지친 몸과 마음은 버티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는 심판대에 서 있었다.
“저는… 내 집 마련이 꿈이었습니다.
그저 안락하게 지친 몸을 쉴 수 있는 집 하나 갖으려던
그 꿈이 그렇게 큰 욕심이었나요?”
"당신이 잘못한 것은 단 하나.
자신의 목숨을 함부로 끊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했어야 하나요?"
"살아내야죠.
당신에게 주어진 삶과 시간이 있었으니까요.
지금부터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딱 하나입니다."
제인의 앞에 어두운 큰 문과
수많은 동물들이 놓여졌다.
제인은 어두운 큰 문을 보고,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곳은 절대 가고 싶지 않았다.
제인의 시선은 고를 수 있는 수많은 동물들로 향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달팽이.."
“달팽이?”
심판자가 되물었다.
제인은 수많은 동물 중에서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작은 달팽이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제인은 담담히 말했다.
"네. 달팽이요.
달팽이는 집 걱정 없이 자신의 껍질 속에서 살잖아요.
유일하게 자신의 집이 있는 동물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도 단호했다.
심판자는 제인의 말을 존중해주었다.
“네 선택을 존중하마.
부디 너의 껍질이 너를 보호하길.”
그녀는 유리바다 끝까지 다 건너자,
사람 제인의 모습은 흐릿해지고
작고 나선형의 껍질 속으로 스며드는 달팽이가 되었다.
제인은 치열한 삶 대신,
오롯이 쉴 수 있는 안정된 집을 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