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리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 업무보다 며칠째 연락이 끊긴 태호가 더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때 꺼져 있어야 할 집안 전등이 환히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리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온몸에 소름이 돋고 두려움이 엄습했다. 손에 잡힌 가방끈을 단단히 움켜잡고, 천천히 집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놀라서 뒤를 ‘휙’ 쳐다보기도 했다.
옷방에서 들려오는 낯선 낑낑거리는 소리에 온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그 짧은 몇 초 동안 몸은 굳어 움직일 수 없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한 사고로 소란스러웠다. 주방에서 빠르게 프라이팬 하나를 집어 들고 천천히 옷방으로 들어왔다. 들어선 옷방 안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을 발견했다. 옷더미에 끼인 흰색 애완견이 힘겹게 몸을 빼내려 발버둥 치고 있었다.
“으악!”
놀란 예리는 그 모습을 발견하자 소파 위로 줄행랑쳤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소파 위에서 고개를 빼고 옷방에 있는 강아지를 멀찍이서 바라보았다. 옷더미에서 빠져나온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거실로 나왔다. 예리는 놀라 발을 동동거리며 소리쳤다.
“오지 마!”
강아지는 예리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 자리에 멈췄다. 예리를 바라보며 얌전히 앉아 기다렸다. 뭐가 좋은지 반갑다고 꼬리는 계속 흔들었다.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예리는 긴장한 채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누구도 강아지의 대해 아는 사람은 없었다.
“도대체.. 너! … 누구니?!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강아지에게 말은 했지만, 돌아오지 않는 답.
“강태호가 두고 간 건가..?”
두 사람은 오랜 친구였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예리는 태호와 함께 있는 것이 당연했고. 그가 없으면 심심하고, 생각할 수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예리가 태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은 같은 회사 혜지 때문이었다. 동기 혜지가 태호를 좋아한다고 잘 되게 도와달라고 했을 때부터 마음이 불편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행동들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동기의 우정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발 벗고 도와주려 나섰지만. 며칠 전 일이 터진 것이다.
강태호는 예리에게 좋아한다며 직접적인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예리는 그 고백에 심장이 요동쳤다. 자신의 심장이 떨리는 것을 보고,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좋은 감정보다 우선적으로 자신에게 태호를 좋아한다던 동기 혜지의 말을 더 생각했다는 것이다.
고민하던 예리의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발신번호는 혜지였다. 예리는 고민하다가 전화를 받았다.
“예리, 어디야..? 나 예리한테 할 말 있는데. 잠깐 볼 수 있어?”
평소보다 혜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낮에 회사에선 전혀 다른 이야기가 없었는데 이 밤에 갑자기 보자는 혜지의 부름이 고민이 되는 게 사실이었다. 예리 자신도 혜지에게 할 말이 있었지만 어려웠기 때문이다.
예리는 다시 가방을 챙겨 집 밖을 나가려는데 거실에 앉아있던 강아지가 눈에 띄었다.
“너. 일단 가만히 있어.”
강아지는 예리가 나가려고 하자, 앉아있던 자리에서 일어나며 꼬리를 흔들었다.
“아니. 가만히 있어. 기다려.”
그러나 강아지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예리가 움직이다가 뒤를 돌아볼 땐 강아지가 한 걸음씩 와서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예리가 문을 열자, 강아지가 먼저 확 튀어나갔다.
강아지를 부르며 쫓아가려고 해도 이미 늦었다. 눈앞에서 빠르게 사라졌다.
“뭐야. 진짜!! 깜짝 놀랐잖아!!! 어디 간 거야!?”
예리는 사라져 버린 강아지 때문에 마음 한편이 불안하기도 했다. 혹시 태호가 두고 간 강아지일 수도 있는데 갑자기 그 강아지를 잃어버렸다고 하면, 태호가 난리 치는 거 아닌가 하는 그런 불안감..
한편, 사라진 강아지는 예리를 떠나 예리와 100M 정도 떨어진 모퉁이로 숨자 곧바로 사람의 모습. 태호로 변했다. 강아지는 예리가 찾던 태호였다. 태호는 예리에게 고백한 날 이후로 갑자기 예리의 주변만 가면 강아지로 변해서 골머리를 앓았다. 이 상황이 무슨 상황인지 알아보기 위해 태호는 예리의 집으로 찾아간 것.
“예리의 체취를 맡으면 내가 변하는 거야… 이게 말이 돼..?! 갑자기 왜?”
도대체 뭐가 잘못된 것인지 태호는 생각에 잠겼다. 최근에 안 하던 짓을 한 적이 있었는지, 하나씩 되짚어보기로 했다. 문득, 예리에게 고백한 다음 날 깊은 고민에 빠져있을 그때..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힘내라며 건네준 그 요구르트.. 뭔가 찝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그 할머니가 했던 말.
“사랑은 그 대상이 생각하는 것도 받아들일 줄 아는 것이지.”
태호는 그때 그 할머니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만났던 그곳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없다. 만날 수 없을까..
우선 자신을 걱정하는 예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문자를 남겼다.
“예리야. 나도 믿기 어렵지만 내가 지금 하는 말이 다 사실이니까 믿어주길 바라. 어떤 할머니가 건넨 요구르트를 먹고 난 이후부터 내가 너의 체취를 맡으면 강아지로 변해. 아까 집에 있던 그 강아지도 사실 나였어. 그 할머니를 찾아야 해. 도와줘.”
카페 안에서 만난 예리와 동기 혜지. 두 사람은 진지한 만남을 가졌다. 혜지는 예리에게 말하기를 주저했다. 예리는 혜지가 무슨 얘기를 할지 몰라서 심장이 두근댔다. 테이블 밑에 놓은 손바닥에 땀이 맺혔다. 가방 끈을 꽉 지고, 예리가 먼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혜지야.. 미안해.”
“…에..? 네가 왜?”
“사실.. 나… 태호 좋아해. 내 마음 정확히 알게 된 건 며칠 안 됐어. 태호랑 너 도와주려던 건 진심이었어. 근데 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조절이 안돼. 그래서 내가 너한테 면목이 없다. 정말 미안해…”
“하하하하”
예상치도 못한 상황이 일어났다. 혜지는 예리의 말에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화를 내는 게 아니라, 웃는다?
예리는 혜지가 화가 나면 웃는 건가 하며 그 짧은 시간 오해를 하기도 했다. 혜지가 웃어대는 탓에 예리는 더 진땀을 뺐다. 배를 잡고 웃던 혜지는 점점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뭐야, 너 너무 귀엽잖아. 생각보다 더 순수한 아이였네.”
“…?”
“나도 오늘 할 말 있다고 했잖아. 빨리 너한테 말 못 해서 미안하네. 네가 날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생각해 줄지는 몰랐는데. 감동인데?”
“뭐야.. 그게 무슨 말인데..”
“나 강태호 안 좋아한다고. 좋아하는지 알았어. 호감 간 건 사실이었으니까. 안 봐도 생각나지 않더라. 그래서 알았어. 안 좋아하는 거. 근데 같이 있으면 재미있고, 안 보면 보고 싶은 사람이 생겼어.”
“정말..?”
“너한테만 얘기하는데 나 최대리랑 사귀기로 했어.”
“뭐?!!!”
“너도 이제 마음 졸이지 말고, 그 마음 솔직하게 고백해.”
생각지도 못한 상황들에 놀란 예리는 태호에게 전화하려고 핸드폰을 꺼내면, 이미 태호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문자 내용을 보고 또 한 번 놀란 예리는 눈이 더 커지며 머리를 굴렸다.
“할머니..?!!”
예리는 할머니라는 단어를 되뇌어 말했다. 그러자 문득 생각나는 날이 있었다. 태호에게 고백받은 날. 폐지를 줍던 할머니를 만났다. 할머니는 횡단보도에 위험하게 쏟은 폐지를 줍고 있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그 상황이 화가 나서 직접 나섰던 예리였다. 고맙다던 할머니는 주머니에 있던 요구르트를 건네주었지만 나는 그걸 받지 않았다. 그 대신 할머니는 예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예리는 처음 보는 할머니 앞에서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처음 털어놓았었다.
“제가 오늘 고백을 받았는데요. 그러면 안 되는데… 제 마음이 떨렸어요. 제가 100M 달리기를 한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서 상대의 고백을 들었을 뿐인데 심장이 숨차도록 빠르게 뛰었어요…근데 그러면 안 되거든요.”
“그라면, 왜 안 되는디?”
“제 동기 혜지라는 친구도 제 심장을 뛰게 한 그 남자를 좋아하거든요.”
“그라면, 포기할겨?”
“근데 또 그게 제 마음대로 되지가 않아서 슬퍼요.”
“바보네. 에효효효. 바보 천치구먼.”
“그쵸… 제가 봐도 바보 같아요.. 그 애가 강아지로 변해서 제 곁에만 있어준다면 이런 고민 안 해도 되겠죠..?”
예리는 그날 그 대화를 생각해 내곤 할머니를 만났던 곳으로 달렸다. 횡단보도, 공원 벤치.. 아무 데도 보이지 않았다. 예리는 태호에게 울면서 전화를 걸었다.
“어. 예리야.”
“태호야. 너 어디야..”
“나 지금 드림공원”
“나도.. 드림공원..”
“너 어디.. 어 보인다. 잠깐. 거기서 멈춰줘.”
“미안해… 미안해. 태호야. 다 나 때문이야.”
예리는 자신의 탓을 하며 태호에게 할머니와 있었던 일을 얘기해 주었다. 그 이야기를 다 들은 태호는 예리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예리를 위로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래서 뭐라고..? 왜 내가 갑자기 개로 변하게 된 거라고?”
“좋아해. 이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미안해. 혜지한테도 다 털어놓고 오는 길이었어..”
이제 더 이상 그 무엇으로 변하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와 함께 있고 싶다고. 예리는 태호에게 고백했다. 태호는 천천히 예리에게 다가왔다. 예리는 태호에게 멈추라고 이야기했지만, 태호는 멈추지 않았다. 예리는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태호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자신도 같은 마음이었으니까.
“그래. 네가 어떤 모습이든 상관없어. 난 그냥 너라서 좋은 거니까.”
“나도 그래.”
태호와 예리가 좁힌 100M.
두 사람이 그 거리를 좁힐 수 있었던 이유는 두 사람의 진심과 서로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멀리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할머니는 손에 요구르트를 든 채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