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내리던 날 밤, 술에 취한 50대 남자가 대리 기사에게 돈을 던지며 아파트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날 밤, 그는 아파트에서 떨어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라디오 뉴스를 듣던 경비원 정 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 있던 경비원 김 씨가 말했다.
“왜 한숨이야? 그놈 우리 얼마나 괴롭혔어. 정 씨는 맨날 정강이 맞고, 난 욕까지 먹고. 잘된 일이지 뭐.”
그때, 경비실 문을 ‘똑똑’ 두드리며 손자 제성이 얼굴을 내밀었다.
제성은 살면서 한 번도 사람을 해치겠다는 생각을 해본적 없었다. 살인은 TV 뉴스에서나 보던 충격적인 이야기일 뿐,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 여겼다.
여덟 살 때 부모님을 졸라 동물원에 가던 날, 비참하게도 제성만 살아남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날 이후 제성에게 가족은 할아버지가 전부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를두고 "부모를 잡아먹은 애"라며 손가락질했지만, 제성은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홉 살밖에 되지 않았던 제성이 어른스럽게 행동할 때면 할아버지는 그를 꼭 안아주며 말했다.
“빨리 크지 않아도 돼. 내가 네 옆에 있잖니.”
할아버지는 제성에게 든든한 산 같은 존재였다. 할아버지와 함께라면 무엇 하나 부러울 것이 없었다. 부족한 것 없이 키워주던 할아버지를 위해, 제성은 열심히 공부하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으며 모범생으로 인정받는 삶을 살았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경비원이 되기 1년 전, 간암 2기 판정을 받았다. 몰래 수술을 받으려던 날, 병원으로 향하던 중 길에서 쓰러졌고, 병원으로부터 연락을 받고서야 제성이 알게 되었다. 전화를 받고 병원으로 달려가던 제성은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다행히 할아버지는 간 이식 수술을 받고 회복하며 완치 판정을 받았다.
하지만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다며 경비원 일을 시작한 할아버지를 제성은 말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주 일터를 찾아가 할아버지가 잘 지내는지 확인했다.
멀리서 지켜볼 때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할아버지의 모습, 정강이를 맞고도 아픔을 참던 모습, 무례한 선물을 받고도 어색하게 웃던 표정이 제성의 가슴에 깊이 새겨졌다. 그 기억은 잔상으로 남아 그를 괴롭혔다.
그날, 그는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할아버지를 지키기 위해 제성은 자신 안의 분노를 억누르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복수를 시작했다.
며칠 뒤, 아파트에서 또 다른 시체가 발견되었다. 경찰은 경비원들을 불러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으나, CCTV에서도 범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최초 신고자인 제성이 조사 대상이 되었다.
경찰들이 제성을 의심하자 시민들은 입을 모아 그를 변호했다. 경찰의 질문에 제성은 당당히 답했다.
“우리 할아버지한테 상한 해산물을 선물로 주셨더라고요. 화가 나서 다시 돌려드리려 갔는데, 집 문이 열려 있었어요. 안에서 아무 대답도 없길래 들어갔더니 주방에 쓰러져 계신 게 보였어요. 놀라서 들고 있던 아이스박스를 내려놓고 다가갔는데 이미 숨을 쉬지 않으시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경찰에 신고했어요.”
제성의 막힘없는 진술에 경찰은 의심하면서도 그를 믿었다.
조사가 끝난 뒤, 제성은 할아버지와 함께 아파트를 나왔다. 아파트와 멀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길에 다다르자 할아버지가 걸음을 멈췄다. 제성도 함께 멈춰 섰다. 할아버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척하는 건 오늘까지만 할게. 내일 가서 사실대로 말하렴.”
그 순간, 제성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알고 계셨어요? 어떻게 알았대..?“
주변은 고요했고, 위태롭게 깜빡이던 가로등 불이 꺼졌다.